시오니즘과 예루살렘 –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며칠전 미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몇가지가 빠졌다. 괜한 오해만 사겠다 싶다. 추가로 몇자 더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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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며칠간 뉴스를 지켜본 결과로는 트럼프의 이번 결정이 중동 정세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논란은 많이 되고 있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예전처럼 중동 정세의 중심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 아마도 그런 판단하에 트럼프의 깜짝 발표가 있었겠지.

다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입지가 중동에서 더 약해질텐데, 트럼프는 별로 상관 안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트럼프 핵심 지지층인 미국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두팔벌려 환영하고 있으니까. 대표적으로 친트럼프계 Paula White 목사는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트럼프 정부 evangelist 자문 위원장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http://www.cnn.com/2017/12/06/politics/american-evangelicals-jerusalem/

기독교계가 모두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미국 공화당을 지지하는 복음주의 계열 기독교인은 열정적인 환호를 보였다. 반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deep concern 깊은 우려’를 표명했고, 정교회쪽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사실 오랜기간 애증의 관계였다. 이를테면 루터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경멸했고, 이는 나치 인종청소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내가 알기로 이스라엘과 유대인, 비유대인 (성경 용어로는 Gentile 이방인)을 보는데에 크게 2가지 관점이 있다.

첫번째는 시오니즘에 동질감을 느끼는 보수 복음주의 계열의 관점이다. 이쪽이 정치적으로는 공화당의 hawkish policy에 동조하는 분들이다.

이쪽 주장을 성경에서 근거를 찾자면 대표적으로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 로마서 11장을 들 수 있다. 유대교는 선민사상에 기반한다. 그러나 본인이 유대인이 었던 바울은 예수교의 신앙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면서 비유대인을 접붙인 올리브나무에 비유한다.

그리고 26절에 이르러서 이렇게 말을한다.

all Israel will be saved. As it is written: “The deliverer will come from Zion; he will turn godlessness away from Jacob.” (NIV) 그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쓰인 말씀과 같습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올 것이니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제거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지난번 포스트에도 시온산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산중에 하나이고, 종종 예루살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유대인에게) 신성한 산이다. 그러니까 보수 복음주의 쪽에서는 이에 근거해서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예수를 믿게되면 예수가 재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난번 포스트
종교의 땅, 예루살렘(12월 7일자)

시오니즘에 공감하지 않는 다른 한쪽이 근거로 대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3장이다. 이 또한 바울의 편지이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할례와 믿음을 둘러싼 갈라디아인들의 신학 논쟁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

할례는 유대인의 징표이다. 당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명확히 갈라서기 이전이었고, 따라서 어떤이들은 할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절차 중에 하나라는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믿는 믿음외에 다른 징표가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3장 28-29절에서는 신분제 사회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There is neither Jew nor Gentile, neither slave nor free, nor is there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If you belong to Christ, then you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 (NIV)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유대인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갈라디아서 선언 이후, 더이상 기독교에서 ‘선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이나 종교나 성별이나 신분에 관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존재로 초대되었다.

여담이지만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내가 성경에서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막부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 하나에 감복해서 예수에 귀의하기도 했고 목숨을 내어놓기도 했다.

대충 정리해보자. 예루살렘이 가지는 의미는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이에게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 회복되어야 할 물리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어떤이에게는 유대인과 타민족은 별다른 차이가 없기도 하다.

사실 미국 (또는 일부 한국)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를 넘어서기도 한다. 트럼프가 종교적인 인물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그의 정치적인 메세지는 분명해 보인다. (외교적으로는 손해만 봤다는게 대다수의 분석이고)

예루살렘은 목놓아 울뿐이다. 그 조그마한 땅에 수천년간 종교적/정치적/지정학적 의미가 얽히고 설켜 흘린 피가 얼마인가.

마지막으로 성경 한구절만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예레미아 7: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기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쳐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I will bring an end to the sounds of joy and gladness and to the voices of bride and bridegroom in the towns of Judah and the streets of Jerusalem, for the land will become desolate.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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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는 왜 산불이 자주날까

지리관련 궁금증을 매번 명쾌하게 정리해주시는 지리샘 페친님의 포스트. “캘리포니아는 왜 산불이 자주날까?”

링크: 대기 대순환과 지형이 만들어내는 캘리포니아의 산불

이건 딴 얘기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캘리포니아 산불 뉴스를 보실 때마다 걱정을 하시는데, 캘리포니아가 애틀란타와 전혀 다른 동네라는 걸 아무리 설명해드려도 마땅해 하지 않으신다.

얼마전에 오셔서 주변에 녹지 비율이 높고, 미국 집이 대부분 목조 건물이라는 걸 보시고는 걱정이 더해지셨다. 산불 한번 나면 정말 일나겠다며.

캘리포니아와 조지아는 기후도 다르고, 지형도 다르고, 거리도 엄청나게 먼… 나라만 같은 미국일 뿐이지 전혀 다른 동네인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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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땅, 예루살렘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 미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는 발표를 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기에 지금까지는 누구도 이를 실행에 옮긴 적이 없다. AIPAC의 영향력 때문에 부시도 공약으로만 이야기 했을 뿐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이 이슈가 예전보다 국제정치에서 덜 민감한 사안이라는 뜻이거나, 트럼프가 워낙 파격적이라는 의미이겠지…)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이 모두 신성한 땅으로 여기는 곳이다. 유대교는 성전이 있었던 곳이기에, 기독교는 이에 더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기에, 이슬람은 모하메드가 하늘로 승천한 곳이기에 그러하다. 현대에 와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크게보자면 이스라엘-중동, 더크게는 기독교-이슬람)의 중심이 되었다.

2년전에 구약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를 되새긴 적이 있다. 생각이 나서 공유한다. 구약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같이 경전으로 인정하는 책이기에 두 종교에 모두 동일한 의미가 있다.

혹시나 모를 오해를 막고자 덧붙이자면, 예전 포스트가 이스라엘이나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혀 정치적인 입장없이 성경을 그자체로 독해했던 내용을 옮긴 포스트이다.

몇천년전 이야기를 현대의 문맥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일은 각자가 딛고서있는 믿음과 지적인 풍토,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다를 것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예전 포스트
시편 121편: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2015년 11월 12일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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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예루살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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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징코와 자이니치

어제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의 Pachinko라는 소설을 언급했는데, 몇가지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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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 Jin Lee (196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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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포스트 링크 (뉴욕타임스 선정 2017년 올해의 책 10권)

자이니치, 그러니까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 본 영상물 중에서는 아래 첨부 다큐 (13분 분량)가 자이니치 (특히 조총련계) 에 대해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미국인의 시각이라 감정적이거나 한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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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남북으로 갈리기 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자이니치들은 육이오 이후 자신의 국적을 정해야했다. 지리적으로는 남한 출신이 많긴 했지만, 재일교포에 무심했던 남한정부에 비해 북한은 이들에게 심적 물적 지원을 했었고, 많은 이들이 북한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했다.

이들은 주로 빠찡코를 운영하며 경제 기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에 강한 동질감을 가지고 있다. 21세기 들어 북한-일본 관계가 급랭하고 북한 군비 자금으로 흘러든다는 비판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빠찡코 운영이 많이 어려워 졌다고 들었다.

며칠전에 서점에서 훑어본 바로는 소설 Pachinko는 정치적인 메세지가 뚜렸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1910년 부터 현대에 이르르는 4대에 걸친 가족사, 사랑이야기, 가족 간의 갈등이 주였다. marginalized 주변화된 인물들에게서 좀더 극적인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 보편적 사실이 아닐까 한다.

뉴욕타임스 선정 2017년 올해의 책 10권

올해의 책 시즌이 돌아왔다. 아래 링크는 NYT 선정 The ten best books of 2017. 올해 리스트에는 (다행인지) 몹시 끌리는 책이 없었다. 소화불량이다. 작년 리스트에서 보려고한 책들도 소화못했는데, 책만 쌓으면 뭐하리.

그래도 올해 리스트에서 눈에 띄는 책 두권만 보자면.

Pachinko by Min Jin Lee (NYT 서평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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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꽤나 주목받은 소설 중 하나이다. 미국 National book award 후보작 이기도 했고.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이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사를 소설로 썼다.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재일교포 이야기에 미국인들이 주목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해서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

Prairie Fires: The American Dreams of Laura Ingalls Wilder by Caroline Fraser (NYT 서평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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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NYT book list 논픽션은 전기가 강세이다. 그중에서 눈길을 끈 책은 Little house on the prairie 초원의 집의 작가 Laura Ingalls Wilder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전기이다.

이유는 첫째 때문. 첫째가 요즘 책읽기에 푹빠져있는데, 최근 초원의 집을 재미있게 읽었나보다. 초원의 집에 나오는 아버지를 몇차례 언급했다. 초원의 집 아빠 Charles는 정말 손재주가 좋아서 초원에다가 직접 집도 짓고 농장도 꾸리고 가구도 만든다나 어쩐다나. 문제는 내 자격지심. 괜히 비교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살짝 언짢다. 서부 개척시대에 mid west에다 집짓는 거랑 내가 비교되다니.

전기는 소설의 배경이 된 잉걸스 가족의 실제 삶을 이야기한다고. 그리고 작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고 한다. 작가들이라고 굳이 복수로 말한 것은 Laura의 딸이 집필 과정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황무한 (게다가 춥기까지한) 미네소타, 위스콘신, 사우스 다코다 같은 곳을 개척한 사람들, 그리고 그 땅의 native Americans 들의 이야기를 읽고서 딸에게 다시 이야기해 주어야할 의무감도 생긴다.

책에서는 개척자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을 개척한 것 처럼 나오지만 실상은 native American들이 이미 살고 있는 땅이었다고. 그러니까 Charles도 주인없는 inhabitable land를 개척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냐고.

뭐 Charles랑 비교당하는게 싫어서 그런건 아니고…

참고
작년 2016 리스트와 내 간단한 커맨트
2015년 리스트

미국의 교정 시스템

김승섭 교수님의 사회역학 공부방 페북연재를 재미있게 읽고있다. 최근에는 미국 교도소와 공중보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페북링크

교수님도 지적하셨지만 전세계 9백만명 정도의 수감자 중에 2백 20만명이 미국인이다. 그러니까 수감자 10명중 2명이 미국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다는 뜻. 인구당 비율은 한국의 7배, 일본의 10배이다.

미국 교도소 수감자가 급증한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마약과의 전쟁, three strike rule, mandatory minimum sentence 등이 원인으로 이야기 된다.

2년 전에에 미국 교도소 관련한 단편을 읽고서 끄적인 적이 있는데, 생각이 나서 다시 찾아 읽어보었다. 뉴요커에 실린 Fifty-Seven이다.

Fifty-Seven과 미국의 교정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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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격률 이론으로 본 미국 수정헌법 2조

재미나게 읽은 이번주 이코노미스트 기사 하나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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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미국 수정헌법 2조를 언어철학자 폴 그라이스의 cooperative principle 협동의 원리를 들어 풀어준다. 수정헌법 2조는 총기를 소지할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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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rice (1913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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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폴 그라이스의 pragmatics 화용론 부터. 기사에서 인용한 폴 그라이스 이론은 협동의 원리 중에서 conversational maxims 대화격률이다. 용어가 여럿 등장해서 어렵게 들리지만, 상식적인 이야기라서 나 같은 언어학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격률은 나는 법칙 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대화할 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법칙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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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격률 중에서 maxim of relation 관련성 격률이 있다. 이건 대화가 문맥상 관련이 있는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런데 그라이스 이론에 따르면 대화 참가자는 (누가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모두 문맥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일부로 이 법칙을 깨면서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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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이런거다. 남편이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데, 부인이 묻는다. “어디 갔다 왔어?” 남편 왈, “ 나 바람핀 거 아니야.” 그럼 이건 아내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관련성 격률에 따르면 어디갔다 왔냐는 질문에 관련있는 답을 해야하는데, 남편이 이 법칙을 깼기 때문에 답변은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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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maxim of quantity 양의 격률이란게 있다. 이건 대화하는 사람들끼리 필요한 정보를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공유한다는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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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예를 들어보자. 마눌님이 남편이 책읽는 모습을 보고서 묻는다. “뭐 읽고 있어?” 남편 왈, “책.” 이러면 남편은 양의 격률을 깬 거다. 마눌님이 이미 책을 보고 있는 걸 알고서 물었는데, 그냥 책이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양의 격률을 따른다면, 책의 제목이나 주제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편은 양의 격률을 깨면서 “방해하지 마.” 같은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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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수정헌법 2조로 돌아오자. 수정헌법 2조는 의외로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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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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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법은 1791년에 제정 되었다. 1791년 이라하면 지금같이 돌격소총이나 권총은 없을 때이다. 화승총, 그러니까 심지에다 불붙여서 총쏘던 그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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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를 휴대할 권리가 명시된 구절이 미 연방정부에 저항할 주정부의 권리와 민병대를 조직할 권리를 전제하면서 언급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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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지적하면서 총기 규제론자들은 총기를 가질 권리는 민병대를 조직하는 일에만 한정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 논리에 따르면 현대에 와서 미국인은 총기를 소지 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18세기 의미의 민병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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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덧붙이자면 당시 민병대는 정부가 소집하면서 무기를 지급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들고 나와서 모인다. 한국 기준으로 예를 들자면 민방위 소집할 때 무기를 나눠 주는 게 아니고, 집집마다 자기 총을 가지고 있다가 동원령이 선포되면 그 총을 가지고 나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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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폴 그라이스의 대화격률로 가보자. 대화격률을 따르면 문장에서 무의미한 정보는 없다. 민병대를 말하는 구절과 총기소지의 권리를 말하는 구절은 모두 개별적으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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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DC v Heller case에서 대법원관 Antonin Scalia 역시 대화격률과 같은 논리를 사용한다. DC v Heller 건은 수정헌법 2조가 사냥이나 호신용으로 총기를 소지할 권한을 보장하는 가에 대한 소송이었다. Scalia는 두 구절이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maxim of relation) 그는 판결문에서 개인의 총기 소지는 free state의 보안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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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n Scalia (1936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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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수정 헌법 2조는 호신용 총기 소지를 허용한다고 따로 명시하지 않는다. 만약 법안 제정자가 호신용 총기 소지를 의도했다면, 그를 추가로 명시하는 행위는 양의 격률도 위배한다. (굳이 명시할 필요가 없음에도 명기 했기 때문에.) 반대로 법안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필요한 정보를 누락해서 격률을 위배한다. 그러니까 양의 격률을 따르면 수정헌법 2조는 호신용 총기의 소지를 금하는 의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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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DC v Heller 건 영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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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언어학으로 보면 수정헌법 2조가 꼭 총기소유를 옹호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는가 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Jeffrey Kaplan이라는 언어학자의 의견도 소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총기소유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더이상 18세기 관점의 민병대도 없고 free state도 없기에 전제가 거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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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물이 무한정 사용이 가능한 자원이라고 하자. 그래서 지주들이 모여서 땅을 개간하는데 쓰는 물은 무한정 쓸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서 물이 희소한 자원이 되었다고 한자. 그러면 그 법이 여전히 유효한가? 화용론의 관점에서는 이미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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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정리를 여기서 마친다. 너무나도 간략한 수정헌법 2조. (애초에 헌법에다 호신용 총기 소유는 금한다 라고 했다면 헌법의 의도가 확실했겠지만…) 이를 제도적,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문맥에 따라 해석하는 일은 현대 미국인들에게 큰 숙제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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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헌법 2조를 제정한 이도 이제는 없고, DC v Heller를 판결한 Scalia도 고인이다. (물론 그들이 악의로 미국 총기 문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은 남아서 아직까지 수많은 현대 미국인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반세계화와 Anti-반세계화

페북에서 작년 오늘 포스트로 페루 APEC 정상회담과 TPP의 우울한 앞날을 예감했던 기록이 떴다. 역시나 예상대로 몇달뒤 트럼프가 취임 하자마자 한 첫번째 일이 TPP 철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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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며칠전 (11월 11일) APEC 정상회담 중에 TPP 참가국이 미국 없는 TPP를 진행하기를 결의했다. 이름하여 CPTPP. (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he T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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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없는 TPP가 앙꼬없는 찐빵이긴 하다. 올해 다낭 APEC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America First 연설에 답변하는 정치적 제스처라고 읽히는 모양이다. 그래도 각국 GDP의 1~2%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니 (아래 도표) 밑지는 장사는 아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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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치적으로는 보호무역이 대세임에도 사실 무역자체는 활황이다. 올해 WTO가 전망한 merchandise trade (상품 무역) 증가분은 3.6%인데 이는 전세계 GDP 증가를 상회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 지역 무역은 올해 상당히 좋다. 아래 그래프는 몇일전 발표된 싱가포르 무역 수치. 확실히 2016년 들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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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읽기

며칠전에 한 페친님과 잡담하던 댓글이 길어져서 기록차 옮겨둔다. 기사 비판적 읽기에 대한 내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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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을 때,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는 정도만 주의하면 매체가 어딘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팩트 부분도 너무 딱 들어맞게 주장을 뒷받침 한다거나, 평소 알고 있는 상식과 심각하게 배치된다면 추가로 검색을 해보거나 출처를 역으로 뒤져보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합니다. 물론 이건 시간이 드니 좀더 관심이 있는 주제에 한해서 가능하겠죠.

비판적으로 읽기만 좀 신경쓴다면 fox news던, CNN이건, atlantic, NYT, 심지어 breitbart 라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네요. 다만 제 기준으로는 fox news 같은 경우는 의견이 심하게 들어가서 (게다가 의견을 사실로 오도도 자주하고…) 잘 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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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푸른 잔디

작년 오늘에는 영국에 있었다. 찍어둔 사진을 보니 푸른 잔디가 참 인상적이다. (location: Willows Activity Farm near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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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쯤 런던에서 요크셔 지방까지 코치(버스)로 이동한 적이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었다. 군대 제대한 지 얼마 안되서였다. 이 넓은 잔디를 관리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까 싶었다. 말년병장 때 작업나가서 예초기를 돌리던 생각도 났었고.

그런데 원래 영국은 풀이 잘 자란다고 한다. 페친님 포스팅을 통해 배웠다. 나무가 자라기 힘든 환경이라 그렇다고. (Cfb 서안해양성기후)

관련 포스트: 뉴질랜드 환경오염의 원흉 낙농업

뉴질랜드 역시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양떼들이 인상적인데, (특히 켄터베리 지역) 편서풍을 타고 들어오는 건조한 바람 때문에 풀이 잘자라는 (바꿔말하면 나무가 자라기 힘든) 식생이 되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알프스 근처도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