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은 유럽의 해밀턴이 될 것인가? – 유럽연방의 꿈

마크롱의 당선 후, EU가 더 강하게 결속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어찌보면 강한 EU 논의는 마크롱 당선 이전에 브렉시트가 시발점이다.

영국이 EU에서 빠진다. 영국은 EU에 애매하게 한발만을 걸치고 있는 나라였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대처의 연방반대 기조를 지켜왔다. 대처는 ‘a federal Europe, which we totally and utterly reject’ 라는 말을 했었다.

20세기, EU가 처음 논의 되던 시점에 EU는 궁극적으로 연방을 꿈꿨다. 1943년 이탈리아의 알티에로 스피넬리 Altiero Spinelli는 European Federalist Union을 창당했고, 46년 처칠은 ‘a kind of United States of Europe’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하나된 유럽, 그리고 강력한 유럽 연방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시점에서 EU의 개혁은 불가피하다. 반EU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올해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거에서 당선자를 못내었을 뿐이다.

좀더 강력한 EU를 추구하던지 아니면 반대로 EU의 구속력을 약화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지금은 조금 어정쩡하다.

관련해서 작년 브렉시트 때 올렸던 글들 링크를 남겨둔다. 당시 좀더 상세하게 정리해두었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참조.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2016년 7월 2일자 포스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016년 6월 30일자 포스트)
관련한 Economist 최근 기사 What is federalism?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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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와 유럽의 평화

EU가 유럽의 평화를 의미하는가?

아래 그림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EU 이후, 유럽에서 전쟁은 사라졌다. 물론 EU 이전에도 전쟁이 줄어드는 추세는 있었다. 예외적으로 양차 세계 대전이 있었을 뿐.

EU는 원래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로 싸우지 말기 위해 경제적으로 묶어두자는 아이디어이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석탄 철강 공동체 ECSC를 설립하고 로마에서 조약을 맺은 것이 그 시초.

그런 연유로 EU는 관료주의적이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경제문제에 있어서 조차)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곤 한다.

EU 비판론을 들을 때, 건강한 비판이나 개혁론에는 공감하지만, 그 비관론이 EU 해체 주장까지 이르면 나는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위 그림을 보고서 세가지 정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첫째, 유럽에서 전쟁이 없었다구? 그럼 유고내전과 구소련 국가간의 무력 충돌은 뭐지?

그림은 EU (원년) 멤버간의 무력 분쟁 만을 한정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유고 내전이나 구소련은 EU가 전쟁을 억지한다는 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둘째, 그럼 냉전이나 EU 안의 폭력은 뭐지?

너무 논의를 끌고 나갔다. 여기서는 전쟁, 즉 폭력의 가장 극단적이고 대규모인 형태, 만이 논의 대상이다. 냉전이나 전쟁 이외의 폭력 또한 중요한 문제 이기는 하지만, 논의를 확장만 해서는 원래의 논점이 흐려진다. (가끔은 그럴 필요가 있지만, 이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셋째, EU 때문에 전쟁이 없어진게 맞냐?

정당한 의문이다. 첨에도 언급했지만, EU 이전에도 이미 전쟁이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양차 세계 대전이 워낙 참혹했기에 인류에게는 더 큰 트라우마로 남긴 했지만…

하지만 EU의 배경, 즉 경제적으로 묶어 놓으면 서로간의 무력 분쟁이 사라진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고, EU 이후 전쟁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기에, 나는 지금까지 EU가 전쟁을 성공적으로 억지했다는 데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편이다.

 

르펜이 극우세력?

어제 르펜 이야기를 꺼낸김에 하나만 더.

르펜의 정책을 들여다보면 국민전선을 단순히 극우 정치세력이라고 보는게 맞는지 헤깔린다. 이제 좌/우 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게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나 싶다.

관련기사
I read the French far-right party’s platform, and it gets one big thing absolutely right, VOX, 2015년 1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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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국민전선의 핵심 아젠다는 반이민이다. 마린 르펜이 아버지 르펜을 제명하면서 나치 찬양에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르펜의 주장은 여전히 위험수위이다. 프랑스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무슬림을 2등시민으로 보는 관점은 극단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이민 문제를 제외하고 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국민전선은 국방비 지출을 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GDP의 2%, 즉 NATO의 권고 수준을 충족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감옥을 증설하고, 낙태를 반대하고, 동성혼과 소수자 우대 정책을 반대하는 이야기는 미국 우파 기준으로 보면 새로운 주장도 아니다.

복지와 금융 쪽으로 가면 더 헤깔리기 시작한다. 르펜은 투자은행과 commercial bank를 분리해야한다고 주장하고 금융거래세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부분은 심지어 (미국 우파에게 빨갱이라고 불리는) 앨리자베스 워랜과 비슷한 주장이다.

복지 부분에서는 (우파 관점에서) 퍼주기 식이다. 내가 보기에도 재원조달에 의문이 들 정도다. 불법 체류 여하를 막론하고, 아이를 세명 이상 낳은 어머니는 복지혜택을 다 누릴 수 있다. 자녀세금 공제 증가, 유치원 관련 정부기금 확대가 주요 공약이다. 관세를 매기고 프랑스 공장을 다시 살릴 것 이기에 공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국민전선의 입장이다.

(르펜은 예전에 오바마 대통령에게 국민전선이 미국 민주당보다 진보적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경제 쪽에서 가장 큰 공약은 유로를 더이상 쓰지 않고 프랑을 다시 쓴다는 약속이다. 국민전선은 무려(!) Milton Friedman을 인용하면서 이 이야기를 한다. 잘 알려진 대로 프리드먼은 유로존이 단일 화폐 지역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사실 좌/우 논쟁에 별 관심이 없기에 그런가 보다 한다. 내게 가장 걸리는 부분은 nationalism의 부활과 EU의 미래다.

기원을 따지자면 EU는 정치적으로 기획된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경제적 통합은 유럽의 결합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추가적인 끈 같은 거였다. 양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데올로기로 끊임없이 싸운 유럽을 평화롭게 만들자고 로마에 모여서 결의한것이 출발이었다. 그런 배경으로 인해 EU는 경제 공동체 임에도 상당수의 의사 결정이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진다.

이번 프랑스 대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만약 르펜이 승리한다면, EU 그리고 크게보면 세계화의 미래가 불확실해지기 때문이다. 르펜이 당선에 실패한다고 하여도 브렉시트 때도 계속되온 EU의 한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제는 불가피해보인다.

Hard Brexit으로 가닥이 잡힌듯

브렉시트의 모델을 두고서 이야기가 많았는데, 어제 테레사 메이의 발표에 따르면, 결국 hard brexit으로 가닥이 잡힌 듯하다.

참고로 브렉시트를 두고서 이야기가 되었던 모델은 네가지가 있는데 노르웨이, 스위스, 터키, 러시아 모델이다. EU와 결합정도가 강한 순서이다. (모델 설명은 아래 도표 참조)

원래 브렉시트 관련해서는 경제이슈보다는 이민문제나 EU로 부터의 자주권 추구가 더 중요한 이슈였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정이긴 하다. 그래도 EU 단일 시장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듯. 국민투표 이후에 파운드는 반토막 났는데 (아래 도표 참조)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런던 사는 친구가 물가가 올랐다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EU 국가 안에서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생겐 조약은 EU 단일 시장의 전제 조건이다. 재화/자본/서비스/거주이전의 자유.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EU 단일 시장에 속해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제 테레사 메이 총리도 육개월 정도 됐다. 테레사 메이 총리는 전형적인 카리스마 스타일 지도자는 아니다. 지난주에 이코노미스트지를 읽었는데 선명한 아젠다를 제시하지 못하는 총리라고 테레사 Maybe라는 별명을 붙였더라. 참 쉽지 않은 시기에 쉽지않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남의 나라 걱정할 때는 아니긴 하다만…

관련한 예전 포스트 링크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 (2016년 11월 27일 포스트)
생겐조약 관련 (2015년 9월 4일 포스트)
EU로부터의 자주권 추구 이슈 관련 (2016년 7월 2일 포스트)

대학 진학률과 스위스에 대한 수다

아래는 팔로우 하는 분 글인데, 원래는 댓글을 달려다가 페친 외에는 댓글달기가 허용이 되지 않아서 퍼왔다. (그김에 페친도 신청했다.)

상당수 동의하지만 몇가지 추가할 이야기가 있다.

Dong-shin Yang님께서 고졸자와 대졸자의 차별이 적은 나라로 덴마크, 독일, 스위스를 드셨는데, 하나만 바로잡자면 임금 격차로만 봤을 때 독일은 대졸자와 고졸자의 차이가 큰 나라이다. 반면 덴마크와 스위스는 확실히 대졸자와 고졸자의 임금격차가 거의 없다. (아래 도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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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스위스에 대해 좀더 수다를 떨어볼까 한다.

나는 스위스에 몇달 체류한 경험이 있다. 스위스는 고졸자에게 졸업후 평균 8만불의 연봉을 준다. 물론 물가가 엄청 비싸서 아주 넉넉한 금액은 아니라는 것이 함정. 그래도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차타고 나가서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옆나라 독일/프랑스/이탈리아에서 장을 봐온다.

그런 연유로 이나라 사람들은 대학에 갈 이유가 별로 없는데, 실제로 대학 진학률이 20~30% 로 아주 낮은 수준이다. 스위스 대학이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했고 교육의 질이 높은 편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낮은 편. 본국 사람들은 정말 공부를 하고싶어 하는 사람만 대학에 가고 나머지는 별 욕심도 없다. 대학 구성원은 대부분 유학생들이다. 언어권에 따라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인들이 캠퍼스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사실 스위스에서는 그냥 농사만 짓고 살아도 사는 게 힘들지 않다. (농사가 쉬운 일이라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보면 스위스가 워낙 농업에 대한 지원금이 크기에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근대 몇달 살아본 얕은 수준의 경험으로 느낀 바로는 그게 그렇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더라. 의외로 스위스인들은 치열하게 살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짧게 있어서 그저 선입견일 수 있겠으나…) 게다가 외부인/외국인에 대한 무지와 차별이 심하다. (지난 월드컵에서 한 스위스 선수가 한국팀에 했던 인종차별 발언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듯.) 조상들이 잘 닦아둔 인프라와 금융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면서 외부인의 접근에 대해 지극히 폐쇄적인 나라가 스위스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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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딴 얘기지만 수다를 시작한김에 하나만 덧붙이자.

스위스의 폐쇄적인 정책은 최근 브렉시트로 영국에 크게 데인 EU에게도 큰 골칫거리이다. 원칙적으로 EU는 하나의 시장을 추구하고, 따라서 국경의 구분이 없는 자유로운 이동과 (EU 내에서) 자유로운 취업을 보장한다. EU의 구성원은 아니지만, 스위스도 EU의 free movement에 동의한 나라였다. 그러다가 2014년 다시 (EU 내에서도) 이민자를 안받기로 했는데, 사실 작은 나라이기에 그냥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브렉시트가 터진 거고 이제는 EU도 예외를 허용하기 어렵게 된 상황이다.

관련 기사
The Economist | Charlemagne: The parable of Ticino (9월 24일자)

대학 진학률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두서없이 스위스 이야기로 끝났다. 정리하는 게 좋겠지만, 그냥 귀찮아서 포스팅 버튼 꾹 누른다.

브렉시트 연재: 4.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이번 달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글을 공유한다. The American Interest에 실린 조너선 하이트 교수의 기고문. 조너선 하이트는 NYU의 사회 심리학자이고, 한국에도 소개된 책 ‘바른마음’의 저자이기도 하다.

When and Why Nationalism Beats Globalism, JONATHAN HAIDT, 2016년 7월 10일자

Jonathan Ha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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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내 포스트는 요약이나 번역이 아니고, 잊기전에 감상을 기록해 두기 위한 메모에 불과하니 내용에 관심있는 분은 본문을 읽을 것을 부탁드린다.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기고문에서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커지고 있는 반이민정서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반이민정서를 단순히 무지나 혐오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가치관의 표현으로 읽는다. 즉 ‘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와 ‘nationalism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읽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남수단에서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과 우리동네 앞 수영장 안전수칙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과의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조너선 하이트에 따르면, 사회가 부유해지면 새로운 가치관이 부상한다. Young urban elite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전통주의 traditional values’ 보다는 ‘세속주의 secular rational’를 ‘생존을 위한 삶 survival values’보다는 ‘자기 표현 self-expression’과 ‘해방 emancipative values’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신뢰가 굳건하고, 범죄율이 낮으며,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 사람들이 그러한 안정을 default로 여기기 시작하면, 상호존중과 자유, 그리고 신뢰에서 오는 낮은 거래 비용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 풍요가 소중해진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cosmopolitanism’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가치일 수 밖에 없다. (하이트 교수의 이 이야기는 잉글하트의 이론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Cosmopolitan들은 존레논의 ‘imagine’이 묘사하는 세상을 천국으로 여긴다.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멀리갈 필요도 없다. 이것은 내가 20대에, 그리고 30대 초반에 꿈꾸던 세상이었다. 군대를 제대할 무렵, 나는 세상에 나가서 뭐를 해야하나 싶었다. 그때 막연하게 넓은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제대 후에 일년간 어학연수도 갔고 몇달간 유럽배낭여행도 했다. 이후에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이어졌다.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지만 미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능력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가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때의 생각과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 내가 미국에 살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시 민족주의로 돌아오자. 어떤 면에서 그들의 (때로는 과격한) 행동을 단순히 인종주의자의 편견으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 민족주의자들에게 애국 patriotism은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이다. 그들에게 민족과 문화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에 도덕적으로 결단한 사람들에 가깝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글에서 말하는 Nationalism은 도덕적 근본주의에 가까운데 어쨌든 여기서는 민족주의자로 표기하기로 하자.)

유럽은 지난 몇년 동안 밀려오는 이민자의 물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물에 빠져 죽어서 해안으로 밀려온 시체들과 트럭과 기차에 숨어들어오는 사람들의 비극을 지켜보고 있자면 절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거기에 아파하며, 외부인을 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cosmopolitan’의 시각을 가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메르켈 총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이민자들이 들어와서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이 흐뜨러지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민족주의자의 시선이다. 헝가리에 몇년간 살았던 한 친구는 나에게 난민들이 기차역에 노숙을 하는 모습에 일종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친구에게 뉴스에 나오는 기차역은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만약이지만, 이웃 나라에서 전쟁이 나서 거지꼴을 한 수천명의 외국인들이 서울역에 천막을 치고 눌러 앉은 모양새다. 게다가 그들중에 일부는 잠재적인 테러범으로까지 여겨지는 상황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아주 극단적이지는 않아서 두가지 모습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다. 본인의 상황에 따라, 또 민감한 이슈에 따라, 두가지 모습 사이 어디 쯤에 있는게 보통이다.

민족주의자들이 지키고자하는 가치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신념일 수 있고, 어떤이에게는 가부장적인 가치일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가치가 ‘인종’이나 ‘민족’ 또는 ‘피부색’과 결합이 된다면 강렬한 인종주의의 모습을 띠게 된다.

민족주의자들이 단순히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르다고 다른이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은 도덕적인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 종종 극단적으로 돌변한다. 그 도덕적 가치는 그룹에 따라 다르다. ‘동성연애’, ‘이슬람’, ‘페미니즘’, ‘개방연애’, ‘환경보호’, ‘마약’, ‘술’, ‘성적 방종’ 등등.

여기서 하나 집고넘어 갈 부분이 있다. 민족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출발점이 다른 사람들이다. 보수주의자는 말하자면 status quo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다수 교육받은 사람들이고, 극단적인 상황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반면 민족주의자는 자신이 믿는 가치의 수호를 위해 극단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마무리를 짓자. 오늘은 반이민정서와 cosmopolitanism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러한 생각의 계기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이다. 아무래도 나는 여전히 cosmopolitan에 로망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리고 타국에서 minority의 삶을 사는지라…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과 유럽 극우민족주의자의 부상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은 여러가지 결을 가진 이야기이다. (따져보자면 두가지 사건을 하나로 묶어 보는 것도 논리적 비약을 감수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을 한가지 관점으로만 이해한다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예전에 브렉시트를 Euroseptic의 관점에서 읽기도 하고,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해해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EU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브렉시트를 읽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지만 여러 각도에서 다시금 생각해보는게 내게도 유익했다.

어쨌든 시절이 시절인지라, 내가 믿는 가치가 가치인지라, minority로 또는 경계인으로 살아갈 숙명을 가진 내 아이들에게는 그게 또 겪어가야할 일인지라, 요즘 뉴스를 보는 일은 참 씁쓸하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브렉시트 연재: 3.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오늘 포스트에서는 브렉시트를 통해 불평등 이슈를 생각해보려한다. 말하자면, 대중은 왜 엘리트 정치인(또는 기성정치인)을 불신하고 트럼프나 보리스 같은 사람들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나는 지금까지 브렉시트에 대한 생각정리를 하면서 주로 EU의 꿈 vs. 대영제국의 꿈이라는 관점에서 포스팅을 해왔다.

나는 브렉시트를 Eurosceptic의 성과라는 관점에서 읽는다. 그러나 Eurosceptic이 (경제적으로는) 불평등 이슈와 (사회적으로는) 반이민정서에 기대고 있다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적인 EU 이슈와 달리 불평등 이슈는 전세계가 다같이 겪는 문제이기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가깝게 다가온다.

생각을 이어가기 위해, 어제 읽은 기사 중에서 하나를 인용 한다.

기사는 작년 9월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실험에 주목한다. 이 실험은 최근 행동경제학쪽에서 주목받고 있는 레이먼드 피스먼 교수가 주도했다. (자세한 내용은 논문 참조: 링크) 실험은 dictator game을 살짝 바꾼 형태이다. (Dictator game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한글 블로그, 영문 위키피디아)

Dictator game은 경제활동이 개개인의 논리적인 이윤추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피스먼 교수의 실험은 이를 조금 바꾸어서, 경제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효율성과 공평함 둘중에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이 파이를 키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효율성의 관점) 아니면 파이가 작아지더라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경제적 평등의 관점) 에 대한 질문이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실제 돈을 주어주고서 (정확하게는 현금등가물) 나누면 나눌 수록 전체 금액이 줄어드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전혀 나누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일정부분의 돈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

결과가 흥미롭다. average American의 경우는 절반 정도가 효율성보다는 공평함을 선택했다. 그러나 예일대 법대 생의 경우는 80% 정도가 효율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UC버클리 학부생은 그 중간 정도이다.

피스먼 교수의 결론은 이렇다.

“엘리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수록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시스템이 그 사람에게 호의적일 수록 배분의 문제에 덜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자유무역’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미국 정치권은 큰정부 vs. 작은 정부에 대한 논쟁 보다는 ‘자유무역’ 논쟁이 더 치열하다. 심지어 데이비드 브룩스는 자유무역 찬반을 기준으로 향후 정치권이 재편될 것을 예상할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와 샌더스는 경제 공약으로 ‘보호무역’을 들고 나왔다.

여론조사를 봐도 ‘보호무역’ 선호가 뚜렷하다. 최근 Brooking Institution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52%의 미국인이 무역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답변을 했다.

캡처

영국의 경우를 보면 브렉시트파는 엘리트가 말하는 무역이익, 즉 EU와의 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은 믿지 못하겠으며, 그보다는 EU 분담금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무역’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관점은 분명하다. 경제학에서 ‘자유무역’이 상호간에 이익이라는 것은 기본 지식에 속하며 이론적으로도 탄탄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효율성을 기본 원리로 두고 있는 경제학에서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TPP를 예로 들어보자.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의 보고서에 따르면, TPP는 2030년까지 미국의 소득을 $131B을 늘일 것이라고 한다. 미국 GDP의 0.5%이다. 경제에서 0.5%는 엄청난 숫자다. 협정하나로 가져올 수 있는 이득으로 보자면 말이다. 그리고 53,700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그만큼의 일자리가 더 생길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니까 순증가량으로 보면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난다.)

매해 6천만명의 사람들이 이직을 하는 미국에서 5만명은 정말 작은 숫자다. 그러나 그 5만명에게는 생계가 달린 일이다. 그리고 TPP가 진행되면 그들과 그 가족/친척들은 가장 강력한 트럼프 지지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경제발전을 포기하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정책결정자 누구도 그러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게다가 포기의 결정이 옳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을 진지하게 보다보면, 과연 그러한 견고한 모델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제 글을 마무리 지어보자. 내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생각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에 대해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공학/경영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효율성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익숙하다. 물론 내가 엘리트라고 느낀 적은 없지만, 최소한 시스템에 어느정도 적응을 하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지금까지 시스템에 우호적인 생각만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 덧: 미국을 기준으로 많은 예를 들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브렉시트와 ‘자유무역’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다. 오히려 영국은 항상 자유무역을 옹호해왔다.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일부 (특히 지식인 층에서) 영국인들은 영국이 EU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비EU 국가와 더 많이 교류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를 선택한 대다수의 저소득 영국인들은 영국과 EU와의 무역으로 얻는 이득을 믿지않았다. 나는 브렉시트가 영국을 더 적극적인 ‘자유무역’ 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전망에는 회의적이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브렉시트 연재: 2.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Vox기자 Amanda Taub의 NYT 기고문을 공유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지난주 영국에 초점을 맞추던 외신들이 이제 EU 내부의 문제를 조명하는 분위기이다.

Euroseptic, 즉 EU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은 EU가 비민주적이며, 각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이나, UKIP의 패라지, 그리고 이번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이 대표적인 Eurosept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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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극우 포퓰리스트로 보는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들을 때마다 Euroseptic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는 듯한 찜찜함이 남는다.

개별국가의 시각에서 EU를 바라보면 EU는 대단히 비민주적으로 작동한다. 영국을 예를 들자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 (이를테면, 그리스를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들…)에 대해 정작 영국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 영국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의사결정을 영국사람이 하겠다는 요구는 정당하며 지극히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는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고, 이익단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미디어와 공론장, 그리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경우에는 청원서를 접수하거나, 헌법소원을 하거나, 아니면 시위에 참가하거나, 이런 행위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EU는 그런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심지어는 영국민 자신에게 중요한 큰 결정에 마저 그러하다.

European Parli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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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첨부한 기사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왜 EU는 비민주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까?

첫째, EU는 원래 그렇게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럽의회의 구성원들은 선거로 선출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technocrat, 즉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개별 국가의 이익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EU 관점에서 최적의 결정을 할 것을 요구 받는다.

EU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럽의 평화와 공존, 그리고 하나된 유럽이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과 개별국가의 이익은 상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나 유럽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는 더더욱 그러하다. EU의 전문가 중심의 의사결정은 이러한 목적에 잘 부합한다.

기사는 두번째로 EU의 지나치게 약한 권력을 지적한다. (헤깔리기 쉽지만, 강한 권력이 아니다.) 유럽 난민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EU는 각 나라에 난민 수용을 강제로 배정할 수 없다. 유럽의회에서 협의를 거친 이후, 각 나라와 다시 협상하고, 부탁하며, 양해를 구해왔다. 유럽 각국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자기 나라가 떠안기는 거부하고 서로 모른척해왔다. 그리고 그 협상의 결과에 대해 개별 국가들은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과 각국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포스팅한 바 있다. European Union을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유럽연합과 각국 정부는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관계와 유사하다.

미합중국도 건국초기에는 연방정부의 힘이 약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서로 견제하면서 성장해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서로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을 때가 남북전쟁이다.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한이 극대화된다. 연방을 탈퇴하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세지가 어디있겠는가.

Webster's_Reply_to_Hayne

Nullification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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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이 강한 연방정부를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된 유럽, 그리고 강력한 유럽 연합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브렉시트 이후, EU는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좀더 강력한 EU를 추구하던지 (강력한 EU는 우선은 UK에 대한 강경대응의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아니면 어떠한 식으로든 민주적인 의사 결정 절차를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사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그리고 엘리트 정치인들과 대중의 괴리이다. 브렉시트 과정에서 영국의 양당은 모두 EU 잔류를 내걸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엘리트 정치인을 불신했다. 사실, 카메룬의 협박(?)은 결론만 보면 틀린말은 아니였다. 그가 말했듯이 Exit을 선택하는 것은 영국민의 선택이지만, 그 와중에서 생기는 사회/정치적인 혼란, 경제적인 부담은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남게되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기성정치에 불만 표시로 브렉시트를 선택하였다.

EU가 태생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은 것 또한 EU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듯이, 엘리트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우려를 표하는 것 또한 나름의 당위성이 있다. 사실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 또한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브렉시트 연재: 1.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요즘 뉴욕타임스에는 브렉시트에 대한 유력인사들의 기고문이 이어진다. 그제는 프랑스 마린 르펜의 기고문이 있었고, 어제는 샌더스의 기고문이 올라왔다.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인의 논평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건 그자체의 의미를 곱씹는다기 보다는 평소에 자신이 주장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사건을 재해석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를 테면, 샌더스 의원의 경우는 브렉시트에서 99퍼센트의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를 읽는다. EU와 UK 엘리트 정치인들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분노가 브렉시트를 이끌었다는 입장이다. 다만, 샌더스는 그들의 분노가 반이민 정서에 기대고 있는 부분은 우려를 표한다. 샌더스가 트럼프와 자신을 구분 짓는 지점이 바로 이민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NYT 기고문에서 ‘자유무역’에 반대하고 ‘공정무역(?)’에 찬성한다는 본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브렉시트를 계기로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전선 르펜 역시 기고문에서 브렉시트를 통해 평소 자신의 주장을 반복한다.

르펜은 기고문에서 브렉시트가 EU의 무능과 독일 중심의 유럽질서에 반기를 든 용기있는 결정이라고 평했다. 하나의 유럽의 꿈은 환상에 불과하고 유럽국가들은 관료주의적인 EU에서 탈출하여 독립주권 행사와 진정한 자유를 선택해야한다고 말한다.

나는 샌더스와 르펜의 주장에 대해 평하기보다는 요새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를 하나만 언급하려고 한다. (이것도 위 두사람처럼 내 관점의 연장선상으로 개별 사건을 보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리라.)

그것은 미합중국 초기의 역사중에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갈등이다. 물론 European Union을 United States of America와 동일한 기준으로 놓고 보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과정상의 진통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갈등 속에서 성장해왔다. 우리에게야 연방이라는 개념이 쉽게 와닿지 않지만, 그리고 현대의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력이 상당히 강해져서 하나의 나라라는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 오지만, 미국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헌법을 보면 주정부의 권한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미묘하게 조정하는데에 꽤 큰 노력을 들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주정부는 이론적으로는 연방정부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nullification이라는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nullification 영문 위키피디아 링크)

Nullification이 정점에 달했던 시점은 앤드류 잭슨이 대통령이던 시절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관세법 거부 사태였다. 당시 잭슨 대통령은 군대를 끌고 가는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주정부의 권한을 짓밟는다. (1833년)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관세는 구실이고, 진짜 목적은 미합중국 해체와 남부연방의 설립이다. 다음에는 노예제를 구실로 삼을 것이다.’ (영문 위키 피디아 nullification crisis 항목 재인용) 이를 브렉시트로 바꾸어 말하면, ‘EU 분담금과 이민 문제는 구실이고, 진짜 목적은 EU의 해체와 대영제국의 재건이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Webster's_Reply_to_Hayne

Nullification Crisis (image source: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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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잭슨의 무력진압은 결과적으로는 남부 주정부들과 연방정부의 갈등을 키우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30년 뒤에 일어난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이 아니라 nullification이 전쟁의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읽을 수 있다.

브렉시트가 여러가지 경제 이슈 (특히 영국의 EU 부담금)와 이민 이슈 (표면상으로는 NHS 혜택), 그리고 (세대간, 지역간) 불평등 이슈들이 엮여서 발생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독일 중심의 EU 체제를 거부하는 영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초기 미국의 연방파 반연방파와의 갈등에서 유사점을 볼 수 있다.

미국 연방주의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된 유럽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EU라는 것도 어찌 보면 오랜 기간 치고 받은 유럽이 생각해낸 하나의 꿈이다. 게다가 미국은 역사와 전통이 없는 진공상태에서 탄생한 나라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원주민을 내쫓고 인공적인 진공상태를 만들었지만…) 반면, EU는 길고긴 역사와 상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들의 집합체이기에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만 현시대를 사는 내가 바라보기에는, 엘리트들이 (정치인, 경제학자, 사상가 등등… ) 서로 다른 가치관과 꿈을 추구하고 치고 받는 과정에서 고통받고 경제적 부담을 짊어가야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라 안타깝다. 그리고 그 꿈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느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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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유럽 난민 이슈와 나

유럽 난민 이슈를 정리해봤다. 오류나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 부탁한다.

생겐 조약 (Schengen Agreement)과 entry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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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Bloomberg)

한국사람이 처음 유럽여행을 하면 신기한게 하나있다. 국경을 넘을때 아무도 여권 검사를 하지 않는다. 95년 발효된 생겐 조약 때문이다. 생겐 조약 이후 26개의 유럽 국가들은 국경을 걷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유럽과 비유럽의 경계선에 있는 나라들의 국경이 실질적인 국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태리, 그리스, 스페인, 헝가리가 이에 해당한다.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가 계속 심각했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없었기에 유럽의 정부들은 오랜 시간 묵살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그리스와 이태리를 통했던 해로가 주요 루트였다면, 최근에 헝가리를 통하는 육로가 주목받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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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T)

문제는 헝가리의 경우는 난민을 받아들인 역사도 없고 (서유럽에 비하면)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난민들도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 또는 영국으로 가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또한 EU는 처음 난민 신청을 한 나라의 난민을 인정하기 때문에 헝가리 같은 경우는 난민을 방치하고 그대로 독일로 실어보내는 일이 최근에 발생했다. (역사 때문인지 독일은 난민에 전향적인 정책을 취해왔다. 난민들은 심지어 독일 총리를 mama Merkel 이라고 부른다고.) 이 뉴스는 현재 진행형인데, 9월 4일 오늘자 뉴스에 의하면 열차 이용이 어려워진 시리아 난민들이 독일까지 걸어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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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rance24)

이런 와중에 숨진 세살 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경제/정치 공동체 유럽

사진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잠깐 EU의 경제적인 부분을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생겐 조약은 EU에서 단일 시장을 구현하기 위한 합의의 일부분이다. 같은 화폐를 쓰는 단일 시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네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1. 재화 이동의 자유 (Free movement of goods)
  2. 자본 이동의 자유 (Free movement of capital)
  3. 서비스 이동의 자유 (Free movement of services)
  4. 거주이전 (또는 노동 이동)의 자유 (Free movement of persons)

생겐 조약이 발효된 근간에는 네번째 자유 즉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난민 사태는 EU의 근간을 흔드는 커다란 위협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리스 사태 보다 더 시급한 위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참고로 네가지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 사태는 두번째 자유, 즉 자본 이동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다.

EU가 출범 했을 당시 유럽은 일단 화폐 부터 통합하고, 나머지는 차례로 통합해 가는 방향을 선택 했다. 그런데, 이 나머지 통합이라는게 갈길이 아직 멀어보인다. 그나마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게, 재화이동의 자유 정도이다. 이는 지금도 Euro의 근본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유럽의 변방 그리스

어찌 보면 유럽 통합은 도달하기 너무 어려운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올해의 큰 이슈였던 그리스 사태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금융으로 드러난 문제와 별개로 그리스가 (서)유럽과 얼마나 이질감이 있는 국가 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리스는 우리에게 서양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잠시 반짝이는 문화를 꽃피웠을 뿐이다. 비잔틴 제국의 한 지역으로 1000년을 존재했고, 이후는 오스만 제국의 일원으로 400년을 살았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망해갈 때서야 자신들의 조상의 찬란한 문명을 기억해 내었고, 발칸반도의 다른 나라와 함께, 민족주의의 바람을 타고서, 열강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도움으로, 간신히 독립을 쟁취했다. 그리스 정교 기반에다가 오스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리스는 어찌 보면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닌 유럽의 경계로 존재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는 EU에서 쫓겨 날 위기에 처해 있다. 또한 중동/아프리카/아시아의 난민들이 들어오는 entry country이니 그 역사가 참 애처럽게 느껴진다. 그리스에 더 관심 있는 분들은 블로거 Santacroce님의 포스트를 볼 것을 추천한다. (그리스 비극1: 그리스인은 유럽인일까?)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리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는 유럽 난민 사태가 유럽인의 정체성의 위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이 어디까지 유럽이라고 선을 그을 것인가,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함께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물론 이전에도 프랑스가 베트남의 보트피플을 받아 들이거나, 핀란드가 소말리아전쟁 난민을 받아들인 예가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생겐 조약과 EU의 통합 덕택(?)에 지금의 난민들은 유럽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종교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유럽의 정체성에 위협을 주고 있다.

아일란과 유럽의 대응

다시 유럽 난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아이란의 사진은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을 테이블로 불러 들였다. 지금까지 난민문제에 상당히 열려 있던 독일을 포함해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영국도 모른척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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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 decisions on asylum applications, 2014 (source: eurostat)

사실 유럽이 얼마만큼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을 지는 조금 의문이다.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이런 문제가 진작에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예를 들어 독일 망명 신청자는 30만에 달하는 데 이는 독일 인구의 0.4%에 해당한다. 민족주의 극우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와중에 유럽이 이를 소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마마 메르켈이라고 하더라도.

민간인 (시인 김종삼)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블로깅을 하면서 나와 관련된 주제가 아니면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정보전달이 내가 블로그를 하는 주된 목적은 아니다. 몇번 그런 포스트를 한일이 있지만, 나중에는 쓸데 없는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능력도 부족하고 전문가도 아니면서 섣불리 아는 척 하는 일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좋아하는 시 때문이다. 아래 시는 읽을 때에 천천히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면서 읽어야 하는 시이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시인은 47년 자신이 월남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기교 없이 쓰여진 이 시가 읽고나면 큰 파장을 남긴다.

어찌보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시리아/아프간/이라크/파키스탄의 사람들이지만, 나의 할머니/할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하고, 아파하는 이웃의 모습이기도 하다.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보면서 내 생각도 정리해보았다. (아참 이 포스팅의 많은 부분은 Santacroce님께 빚져 있는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