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와 보수 기독교 가치관에 대한 생각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 가끔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소위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강력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일까. 물론 이건 미국 정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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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에서 낙태는 항상 중요한 이슈였다. 그리고 최근에 동성애 이슈가 더해졌다. 몇몇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낙태 금지가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pro-life라는 이유 만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도 한다. (우리말로는 낙태 반대/찬성으로 쓰는 게 맞겠지만, 여기서는 pro-life/pro-choice로 표기하기로 하자.)

그렇다. 특정후보는 트럼프를 말한다. 처음부터 트럼프가 보수 기독교인들의 표심을 대변하지는 않았다. 공화당 경선에서 마지막까지 트럼프를 추격했던 테드 크루즈가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인을 대변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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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은(?) 기독교인들에게 트럼프는 너무나도 저속하고 세속적인 사람이다. 그는 대법관으로 pro-life 노선인 사람을 지명하겠다고 하면서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대법관에 보수적인 인사를 지명하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은 누구에게라도 표를 던질 것이라고 비아냥 거린다.

사실 트럼프는 낙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어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낙태 말고도 대부분의 이슈에 대해서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무지가 금새 드러난다.) 이번주 수요일 마지막 대선 토론에서 낙태 이슈가 언급되었다. 그는 힐러리가 말하는 대로 하면 임신 9개월된 태아를 자궁에서 꺼내는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며 pro-life를 지지한다고 했다. “If you go with Hillary is saying, in the ninth month you can take the baby and rip the baby out of womb of the mother.”

그가 낙태의 끔찍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미국에서 낙태가 합법이라고 해서 실제 그런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9개월 된 태아는 인큐베이터에 넣는게 보통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를 사산하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임신 후기로 넘어가면 낙태하는 경우가 원칙적으로 없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일부 주는 법으로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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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법관’ 선정 이슈를 이해하려면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미국 대선에서 후보의 진보/보수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미국 대법원이 가진 독특한 위상 때문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헌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리는 독자적인 권한이 있다. 미국 헌법이 워낙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고 모호하게 쓰여져서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진 연방 대법원의 판례는 향후 다른 재판의 근거가 된다.

미국에서 낙태는 1973년 Roe v. Wade 건 이후 합법이 되었다. 미국 보수 기독교계는 이를 뒤집으려고 오랜시간 노력해왔다. 그러다보니 9명의 판사가 다수결로 판결을 내리는 연방 대법원에서 대법관의 진보/보수 구성비가 중요하다. 그리고 종신직인 대법원관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진보/보수 여부가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미 1명이 공석이고,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2~3명의 신입 대법관의 보수/진보 구성비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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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에서 보수 기독교 유권자층은 혼란을 겪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은 트럼프이다. 트럼프 이전, 보수 기독교 유권자들은 대선 후보자들이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졌는가를 먼저 판단했다. 그리고서 그 후보자가 대법관으로 보수적인 인물을 선정할 것인지를 가늠해 보고서 지지 여부를 결정했다.

트럼프는 이 과정을 역으로 뒤집었다. 본인이 먼저 유권자들에게 ‘pro-life’ 재판관을 선임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언행은 저속할 뿐 만아니라 그는 기독교적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그는 최소한의 가식적인 예의도 없다.

트럼프의 언행은 기독교 유권자들이 쉽게 (또는 떳떳하게) 공화당을 지지하기 어렵게 한다. 대표적으로 비디오 테입 유출 사건 이후로 유타주의 이탈현상이 특히 두드러진다. 트럼프에게 도저히 표를 못 주겠다는 사람들이 제3후보 맥멀린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맥멀린은 제 3후보로는 이례적으로 유타에서 22%의 지지율을 보인다. 물론 유타가 맥멀린을 뽑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만약 그가 당선되면 1968년 이후 매번 공화당을 지지했던 유타로서는 큰 이변이다.

그렇다면 대법관 선정 이슈를 떠나서 개인 도덕성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난주에 발간된 한 조사에 의하면 61%의 미국인들이 개인의 도덕성과 대통령 후보의 자질은 무관한다고 답했다. 불과 5년 전에 같은 질문에 44%였던 것을 생각하면 큰 변화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질문을 백인 복음주의자 기독교인에게 했을 때, 72%의 사람이 도덕성과 대통령의 자질이 무관하다고 답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이 그룹은 5년전에 30% 만이 무관하다고 답했다. 예외가 유타주의 몰몬들이다.

(한국 기독교 기준으로 몰몬은 이단이지만, 미국에서는 이단에 대한 적대감이 그리 크지 않고 오히려 도덕적인 이슈에서는 기독교와 몰몬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대체로 미국 정치 분석에서는 몰몬을 기독교 유권자에 포함 시킬 때가 많다.)

관련 여론 조사 출처

Clinton maintains double-digit (51% vs. 36%) lead over Trump | PRRI/Brookings Surv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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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왜 기독교인은 보수적인 정치색을 보일까.

기독교 안에서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살펴보자. 사실 모든 기독교인이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내게 2주전에 있었던 부통령 후보 토론은 몹시 흥미로웠다. 둘의 토론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두 정치인이 어떻게 다른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펜스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차례 포스팅한 적이 있다. 펜스는 학부시절 예수를 만나고 회심한 이후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소위 말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는 비속어를 말하기도 불편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한 것은 작년 인디아나 주에서 낙태를 제한하는 법을 통과 시키면서 이다. 그는 태아를 생명으로 믿고, 그 신념하에서 인종, 성별, 유전병 같은 어떤 이유로도 낙태 시술을 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그는 생명은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물론 이 법은 현재 연방 대법원에서 위헌 판정을 받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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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크루즈와 마이크 펜스 (07/21)

팀 케인 역시 종교적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학부시절 1년을 휴학하고 예수회 선교사로 온두라스에서 선교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

그는 최근 NCR (카톨릭 뉴스)에서 개인의 종교 신념과 공직으로 정치인의 입장이 충돌 하는 상황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 바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심지어 히틀러 조차도 사형을 시행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인 동시에 국가의 시민이고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기에 버지니아 주지사로서 11건의 사형집행을 진행시켰다고 한다.

팀 케인의 말을 인용한다. “The hardest thing about being a governor was dealing with the death penalty. I hope on Judgement Day that there’s both understanding and mercy, because it was t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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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ually motivated: How Tim Kaine navigates his faith and politics, NCR, 08/25

부통령 후보 토론에서도 낙태 이야기가 나왔다. 펜스는 평소대로 자신의 신념을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인 태아를 지우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팀 케인에게 되묻는다. 생명을 존중하는 후보께서 어찌 pro-choice를 지지할 수 있는가?

팀 케인은 여기서 직답을 회피하고 화살을 트럼프에게 돌린다. 트럼프는 낙태한 여성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펜스는 트럼프가 세련된 정치인 polished politician은 아니지 않냐면서 쉴드를 친다.

여담이지만, 부통령 후보 토론은 본인들의 토론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기에 결국은 서로의 대통령 후보를 방어하거나 상대방측 후보를 비판하는게 주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올해 토론이 정확히 그랬다.

부통령 후보 토론 스크립트

그렇다면 팀 케인의 평소 입장은 어떨까. 그는 낙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정부는 여성들에게 결정을 할 권리를 주여야 한다고 말했었다. “I’ve got a personal feeling over abortion, but the right role of government is to let women make their own decisions.”

개인적으로는 케인의 의견에 80% 쯤 동의한다. 여기에 내 의견을 더하자면, 개인의 종교적인 (또는 도덕적인) 신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동일한 신념을 가지지 않고 있는 타인에게 그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낙태를 금지할 때 그 부담을 지고갈 당사자는 국가가 아니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하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는 국가차원에서 이뤄지는 꼰대질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케인의 이러한 애매(?)한 입장은 비판을 받기 딱 좋다. 실제로 펜스는 토론회에서 케인이 pro-choice를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Hyde Amendment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참고로 Hyde Amendment는 연방정부가 낙태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이다. pro-choice인 힐러리가 폐지 하려고 하는 법안이지만 기독교인 케인은 Hyde Amendment를 지지한다.)

강경한 pro-life인 펜스 입장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이다. 위선이나 박쥐 같은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선으로 보는 것은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공적인 영역에서 pro-choice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낙태를 권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결론을 맺는다. 현대에 와서는 정치인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애매하고 불확실한 사안에 대해 결정할 것을 강요당한다. (때로는 결정을 하지 않는 것 조차 결정이다.) 그리고 사안에 따라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방향, 그리고 이념적 노선은 자주 충돌하게 마련이다.

이런 때에 정치에서는 선명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분들은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유권자들이 모두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선택들은 더욱 어렵고 본질적인 문제가 된다. 매일의 삶에서 복잡한 현실을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재점검하며 행동을 바로잡는 일은 누구나 해야하는 일이 아닌가. 최소한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신앙인의 모습에 따르면 그러하다.

한때는 유권자층의 종교와 지지자의 종교의 일치 여부가 중요한 시절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케네디 시절 그의 캐톨릭 신앙은 선거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지금은 후보자의 신앙 자체가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한국도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장로님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다만 지금에 와서도 유권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선명한 이념이나 또는 (특히 미국의 경우) 종교적인 가면 뒤에는 대부분 정치적인 계산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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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중우정치

최근 미국 정치 덕후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칼럼을 하나 소개한다.

칼럼은, 트럼프의 등장을 이야기 하면서, 너무 많은 민주적인 절차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칼럼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 주류 보수가 트럼프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잘 보여주는 칼럼이고, 민주주의에 대해, 미국 정치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도 볼 수 있기에 한번 정리해 보기로 했다.

Democracies end when they are too democratic (New York Magazine, 5월 1일자)

캡처

필자는 정치 블로거로 유명해진 Andrew Sullivan이다. 여담이지만, 이 아저씨는 게이인데, 성소수자 이슈를 제외하고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졌다. 게이이면서 보수주의자인 기묘한 조합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참 미국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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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을 번역해볼까 하다가, 워낙 장문이고 굳이 100% 동의하지 않는 글에 잉여력을 소진할 마음까지는 동하지 않은지라, 몇가지 논점만 살펴보려고 한다.

칼럼은 이번 미국 대선이 플라톤의 ‘국가’의 한 부분을 연상시킨다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As this dystopian election campaign has unfolded, my mind keeps being tugged by a passage in Plato’s Republic.

그리고선 플라톤이 말했던, 민주정에서 참주정으로의 이행을 언급한다.

And it is when a democracy has ripened as fully as this, Plato argues, that a would-be tyrant will often seize his moment.

간단하게 플라톤이 말한 민주정(democracy)과 참주정(tyrant)을 정리해보자. 내가 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내가 이해하는 수준에서의 정리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민주정은 자유를 최선의 가치로 추구하는 체제이다. 그리고 민주정은 다수의 하층민과 소수의 부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민주정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숫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자유를 최대한 누리기 위해 부를 부자에게서 뺏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때 선동가 (demagogue)가 등장하여, 소수 부자들에게서 부를 빼앗아 나눠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동가는 다수의 힘을 조직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어낸다. 선동가는 자신의 권력의 기반이 약한 초기에는 대중의 약속을 지키고 정의를 실현하는 듯 보이다가, 곧 늑대로 돌변하여 숙청을 한다. 참주가 된 선동가는 대중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외부인에 대한 증오를 키운다.

Andrew Sullivan은 트럼프의 모습에서 플라톤이 말한 선동가를 보았던 것 같다. 아주 역겹다고 말한다. 물론 그도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과 현대 민주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소크라스 시대와 달리 미국은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 될 수 있게 고안되어 있다고 말한다.

Part of American democracy’s stability is owed to the fact that the Founding Fathers had read their Plato. To guard our democracy from the tyranny of the majority and the passions of the mob, they constructed large, hefty barriers between the popular will and the exercise of power. Voting rights were tightly circumscribed. The president and vice-president were not to be popularly elected but selected by an Electoral College, whose representatives were selected by the various states, often through state legislatures. The Senate’s structure (with two members from every state) was designed to temper the power of the more populous states, and its term of office (six years, compared with two for the House) was designed to cool and restrain temporary populist passions. The Supreme Court, picked by the president and confirmed by the Senate, was the final bulwark against any democratic furies that might percolate up from the House and threaten the Constitution. This separation of powers was designed precisely to create sturdy firewalls against democratic wildfires.

미국의 정치 체계는 의외로 보수적이다. Andrew Sullivan이 정리한 위의 문단은 미국 정치가 처음부터 얼마나 보수적으로 설계 되었는가를 잘 요약하고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가 대중의 인기와 일시적인 유행에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랬다. 이를 테면, 대통령은 선거인단에 의해 간접 선거로 선출한다. 그리고 상원은 주별로 2명씩 상원 의원을 선출하는데, 이는 인구수가 많은 주에 힘이 집중되지 않게 만드는 장치이다. 또한 6년 임기의 상원 의원은 2년 마다 1/3씩 나누어서 선출하는데, 이를 통해 일시적인 정치 돌풍이 상원을 한번에 바꾸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 또 대법원 판사는 대통령에 의해 선출되고, 상원의 승인을 받게 되어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한 이러한 제도들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Principle of Checks and Balances)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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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장치에 포함된 비민주적인 요소들은 몇 세기에 걸쳐 변하게 된다. 점차 direct democracy가 된 것이다. 우선 선거권이 여자와 흑인에게도 주어졌고, 선거인단 제도도 변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미국식 경선도 1968년도의 Democratic convention 이후에 정착되었다. 그리고, 기성 정치인이 아닌 outsider의 대권 도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최초는 1940년 공화당 후보인 Wendell Willkie이다. 그는 정치 경력이 없는 사업가였다. 결과는 선거에서 루즈벨트에게 참패. 이후에도 Ross Perot, Jesse Jackson, Steve Forbes, Herman Cain 같은 outsider들이 도전을 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올해는 알다시피 Ben Carson, Carly Fiorina, Donald Trump가 있다.

여기까지 읽다보니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 생각났다. 바로 1987년 민주화 열풍, 그리고 혼돈기를 거쳐 정립된 대통령 직선제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한 대통령 간선제가 미국 대통령제의 틀이 되었듯이, 대통령 직선제 전환은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점이었다. 당시 한국은 세계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는 독재국가였고,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대표되는 나라 였다. (요즘에 우리가 브라질/그리스를 바라보는 것 처럼 말이다.) 그 혼돈을 일순간에 잠재웠던 사회적인 합의가 대통령 직선제의 약속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우리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진 대통령 직선제가 민주주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대다수의 독재 국가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체택하고 있고, 선거의 공정성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독재를 강화할 수 있는 제도 이다. (마르코스 라던가 우고 차베스 라던가…) 그러나 한국은 1980년대를 지나며 대통령 직선제가 공정한 게임과 동의어가 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한국 정치의 정체성이되었다.

각 나라의 선거 제도와 장단점에 관해서는 아래 자료를 참조하면, 유용할 듯 하다. 특히 정치학도라면 필독 자료가 아닐까 싶다. 자료를 보면서 어떤 제도도 옳고 그른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점과 단점이 있을 뿐이다. 역사적인 배경과 국민의 합의에 의해서 절차가 세워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Electoral System Design: the New International IDEA Handbook

다시 Andrew Sullivan 칼럼으로 돌아와서, 이 아저씨는 미국 정치 시스템이 direct democracy로 변하면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21세기 민주주의는 media democracy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트위터, 페이스북이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대중은 눈이 먼채 욕망만을 쫓고 있다. 이것이 미국 건국 아버지들이 가장 우려했던 그 상황이다. 사유와 실증에 기반한 논의는 사라지고,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감각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대중만이 남은 것이다.

And what mainly fuels this is precisely what the Founders feared about democratic culture: feeling, emotion, and narcissism, rather than reason, empiricism, and public-spiritedness. Online debates become personal, emotional, and irresolvable almost as soon as they begin. Godwin’s Law — it’s only a matter of time before a comments section brings up Hitler — is a reflection of the collapse of the reasoned deliberation the Founders saw as indispensable to a functioning republic.

참고로, 예전에 나도 미디어와 트럼프라는 주제로 포스팅을 한적이 있는데, 관심있는 분은 여기를 보면 된다.

여기까지가 칼럼의 반정도 내용이고, 나머지는 왜 미국 민주주의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트럼프는 어떻게 이 기회를 잡았나에 대한 Sullivan 아저씨의 분석이다. 이 아저씨는 책을 많이 읽었는지 다양한 사람들을 인용한다. 거리의 철학자 Eric Hoffer, 소설가 Sinclair Lewis같은 사람도 언급한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두도록 하겠다. 나의 잉여력 발산도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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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Hoffer

그래도 아쉬우니까, 이 아저씨의 주장을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타락한 21세기 미디어 민주주의는 플라톤의 참주정을 연상시키고, 트럼프 같은 선동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는 정치 elite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고 트럼프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정도 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