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미국 대선 감상

머리 속이 복잡한데, 그래도 뭔가는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끄적인다.

트럼프 당선이 유력해졌던 11월 8일 밤11시 경, 내가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당혹감이 잦아들자 몇몇 백인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나의 이웃이고 직장 동료이며 딸내미 학교 학부모들이다. 나는 공화당 강세인 deep south에 살고 있기에 그 친구들이 트럼프를 뽑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선거 전에 가볍게 지나가는 말로 그들은 말했다. ‘트럼프나 힐러리나 둘다 형편에 없어서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부분 신실한 기독교인인 그들의 말은 사실은 ‘트럼프가 흠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힐러리를 뽑지는 못하겠어요.’ 라는 이야기라는 것을 선거가 지나고야 깨닫게 되었다.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중에 은퇴한 두 분이 있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자란 전형적인 남부 복음주의자 기독교인이다. 인구 분포로 따지면 60대 백인 대졸자들이기도 하다.

한분은 러스트 벨트 지역인 오하이오 출신이고, 지금은 은퇴를 하고 플로리다에 정착했다. 한번은 그분이 휴가 기간에 고향에 다녀오고서, 옛날 친구들을 만나보니 반갑긴 했지만 동네가 너무 우울해 졌다고 했다. 한때 미국의 공장으로 활기가 넘쳤던 곳이 지금은 생기라곤 없으며 친구들은 대부분 술에 빠져 산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분과는 페친이기도 한데, 생전 포스팅을 안하던 분이 선거 이후 쌤통이라는 뉘앙스의 포스트를 올렸다.

다른 한분은 켄터키 출신 HR 매니져인데, 최근 은퇴를 했다. 그분과는 아직도 가끔 만나서 커피를 마신다. 문학을 전공하셔서 주로 책이야기나 여행이야기를 한다. 한번은 내가 뉴욕타임스를 읽는 것을 보자. 약간 껄적지근한 표정으로 뉴욕타임스 애독자냐고 물어봤다. 잠깐이었지만 나를 사회주의자 신문을 읽는 이민자로 보는 시선을 0.5초 쯤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미국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정치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적은 없다. 오히려 회색 인간에 가까워 여기저기 색깔이 분명하지 않다며 오해를 받는 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페친도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유독 이번 선거 이후에는 승리에 들떠있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포스팅을 보는 일이 괴롭다. 그만큼 내게 트럼프는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공화당의 차례가 될 가능 성이 컸고 그래서 경선 과정에서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후보자가 공화당에서 되기를 바랬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

공화당의 정치적 노선에 100%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의 정치 노선에 100% 반대하는 것도 아니기에 선거 결과 자체에 보통은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대통령 선거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닐 뿐더러 대통령 하나를 잘못 뽑았다고 세상이 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갑갑한 일은 종종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트럼프가 주장하는 이야기의 상당수가 음모론에 근거한다는 점. 그리고 그의 정책이 사실상 디테일이 없다는 점은 나를 못견디게 만들었다. 나의 삶의 자세랄까 그런 부분과 정확하게 대치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포스팅을 한적이 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이야기었다. 아툴 가완디의 칼텍 졸업식 축사를 인용하면서 말했다. 젊은 시절 내가 가방끈을 늘려가며 유일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으로 삶을 보는 자세 같은 것이다. 과학은 놀라운 지식이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 대한 결단이고, 사실과 근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겠다는 결의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 가짐은 세상을 사는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이전 포스트: The mistrust of science (7월 12일자 포스트)

음모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다보면 증거나 사실이 없어도 그저 간단하고 이해가 쉬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없는 주장과 말의 성찬이 공허한 것은 역시 같은 맥락이다.

20대를 거치고 30대에 이르러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은 어떤 주장을 할 때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그 자체는 어찌보면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진정 그 주제를 가지고 씨름을 했는가 삶을 통해 드러나는 주장인가는 대부분 디테일에서 판단이 갈린다.

대선 토론을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트럼프에게는 그러한 디테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은 중요한 이슈에 대해 서로 공약을 들고서 지겹도록 토론하고 싸우면서 하나하나 집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토론에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내 주위의 공화당 지지자들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내 주변의 공화당 지지자들이 처음부터 트럼프를 지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럼프가 공화당 전체의 지지를 얻기까지는 경선 과정 1년이 꼬박 걸렸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내 주변의 지지자들은 골수 트럼프 팬은 아니었고 대다수 교육을 받은 소위 교양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결국에 선거 마지막에 트럼프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를 모두 끌고 오는 데에 성공했다.

아마 트럼프의 골수 지지자를 찾으려면 러스트 벨트 지역이나 탄광지대인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르는 지역의 백인들을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돌아서서 트럼프에게 승리를 안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며칠전 뉴요커에서 웨스트버지니아 로간이라는 곳에 선거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실었다. 애팔랜치아 산맥 일대는 탄광지대로 지금은 경제 활력을 완전히 잃은 곳이다. 우리로 따지면 강원도 탄광지대 정도 되려나 싶다.

기사 링크:

Learning Trump won, in West Virginia (뉴요커 11월 10일자)

The people of Logan, West Virginia, are used to being different from the rest of the country, but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they were more mainstream than they knew.

image source: 해당 기사

.

그곳의 퇴역군인 Ojeda는 열성 트럼프 지지자이다. 그는 트럼프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선거 당일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선거 결과를 본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쁨에 잠시 눈물을 흘렸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흥분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그가 사는 지역은 80%가 트럼프를 뽑았다.

물론 그는 트럼프가 공약 대로 석탄 산업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들을 집행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가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Nothing’s good anymore. And I think for the first time people stood up and said, ‘We’re tired of the direction we’ve been going down for the last eight years.”

그가 느끼기에 트럼프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어준 정치인이다. 이전 후보들은 선심마냥 복지 예산을 편성하는 것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했다. 트럼프와 탄광촌 사람들을 엮어서 조롱하는 코메디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트럼프 지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입을 빌자면 그들이 딱히 라티노와 불법 이민자들에게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라티노나 불법 이민자들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백인이 대다수인 동네에서 평생을 지낸 사람들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동네 사람들은 인종에 대해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무의식중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불리기는 싫다는 생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트럼프가 등장하고서 이제 그런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들의 이야기다. “People feel free to say what they really think.”

(잠깐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사실 인종차별은 타인종과 만나볼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세계에 대해 무지해서 정말 인종차별적인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흑인이면서 트럼프를 지지한 Jones라는 인물의 이야기도 옮긴다.

“Honestly, I don’t think anything’s going to change. People of color in this state struggle no matter what. We struggle under Democratic leadership, and we struggle under Republican leadership. A lot of African-Americans in this state feel that their situation was not improved by having an African-American President, and it wouldn’t be improved by either Trump or Clinton. I was proud to have a part in electing the first African-American President, but is my life strikingly better now? I don’t think so. We’re suffering in this state, and I don’t see any end in sight.”

트럼프 지지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꾸 설득하고 싶은 생각이 치민다.

그래서 트럼프가 당신들의 목소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나같이 배운 사람들이 당신들을 잊고 있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가 당신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줄 것 같는가? 그는 말로는 여러가지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어떠한 계획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여러분을 더 힘들게 할 것이다.

요즘 뉴스나 그들의 포스팅을 보다보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트럼프를 뽑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트럼프의 부적절한 행동과 인종적인 발언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들이 남는다. 그런데 그들이 트럼프를 뽑았다고 해서 트럼프의 행동을 전부 용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전하는 하나의 메세지에 공감하고서 그의 부적절한 언사들이 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America needs fixing. I am your voice!”

그들에게 기쁨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지하던 트럼프에 비관적인 전망을 보이던 기성언론들을 한방 먹였다는 사실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한방을 먹였다는 쾌감이다. 운동경기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약팀이었는데 이겼다는 쾌감과 그다지 다를 바없다. 나는 여전히 한마디가 하고 싶다. 그래서 그게 너희들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될 것 같은가. 다시금 내 머리 속에 들리는 대답은 똑같다. 그건 의미 없다고 어쨌든 누가 내 목소리가 되어 통쾌하게 한방 먹이지 않았냐고.

그리고 트럼프에 불안해 하던 나머지 미국인들도 지금은 긍정모드로 바뀌어서 이전의 부적절한 트럼프는 사라지고 자신이 꿈꾸는 good Trump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건 마치 신혼 초기에 상대 배우자의 단점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이 기대하는 좋은 모습만 남아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것 이라는 기대나 다름 없다.

글쎄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4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고, 어찌 되었든 누구나 자신의 이유가 있어서 트럼프를 뽑았을 테니.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느끼는 비관적인 감정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고, 모두가 만족하는 세상이 왔으면 그게 트럼프라고 해도 나는 큰 불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었노라고 내말을 기쁘게 번복할 것이다.

Advertisements

The Barber by Flannery O’Connor

이전 글에 이어서, 플래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의 다른 단편, 이발사 The Barber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한다. 보통은 책읽고 기록을 남길때, 줄거리 요약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데, 요새 같은 때에 이 소설은 줄거리 요약 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대학 교수인 Rayber는 애틀란타에 있을 선거 Democratic White Primary 이야기를 이발사와 한다. 리버럴을 자처하는 그는 이번 선거에서 Darmon을 뽑는다고 했고, 이에 이발사는 Rayber를 ‘검둥이 옹호자’로 매도한다. Rayber는 자신은 ‘검둥이 옹호자’도 ‘백인 옹호자’도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발사는 Hawkson을 지지한다. 이발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Hawkson을 선동가 demagogue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쇼맨십이 대단한 사람이다. 이발사는 Hawkson이 백인 구역에서 검둥이를 쫓아내고, 번드르하게 호의만 베푸는 헛똑똑이들을 혼쭐 내며, 자기들을 돈 벌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 1947년에 발표된 소설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장면들인지.)

Rayber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논리적인 반박문을 준비한다. 친구는 이발사와 논쟁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Rayber는 그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발소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읽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Rayber는 격분한 나머지, 이발사의 멱살을 잡고 말한다. “내가 니 둔해 빠진 정신을 바꾸려고 이러는 줄 알아? 도대체 날 뭘로 보고? 내가 니 빌어먹을 무식함을 어떻게 해보려고 이러는 거 같애?”

그리고서 Rayber는 뛰듯이 그자리를 나온다.

download

Flannery O’Connor (출처: wikipedia)

Revelation by Flannery O’Connor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지역적인가? 어떤면에서 그러하다.

Flannery O’Connor의 계시Revelation을 읽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남부 사투리, 노예 해방 이후의 시대 상황, 면화 농사가 기계화 되기 시작하던, 그시절 조지아를 생생하게 그린다.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은 읽기가 그다지 즐거운 책은 아니다. 짧고 간결한데, 읽고 나면 찝찝한 느낌이 남는다. (Revelation은 그중에서 그나마 덜 찝찝한 작품이다.) 그녀는 주로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묘사한다. 인종차별, 종교적 위선을 가진 조지아 시골 사람들 이야기는 극단적이지만 묘하게도 나를 포함한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로 읽힌다.

소재나 분위기, 찜찜한 결말을 감안해도 그녀의 단편을 읽는 건 쉽지 않다. 읽다보면 시골사람들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n-word와 인종차별 발언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여담인데, 나는 영미 소설을 읽을 때,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버릇이 있다. 처음에는 영어 공부 차원에서, 나중에는 읽으면서 문장의 리듬감이나 속도감을 느끼는게 좋아서 그런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Revelation을 읽을 때는 소설 곳곳에서 n-word와 politically correct 하지 않은 대사들이 자주 등장했고, 급기야 아내가 오코너 소설 소리내어 읽기를 금지시켰다. 뒷부분은 눈으로 읽어야 했다.

소설은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도덕적으로, 겉모습으로, 교양측면에서 모든 면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Mrs. Turpin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아, 정확히는 Mrs. Turpin의 시각을 묘사하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어쨌든 그녀는 병원 진료 대기실에 앉아서 주위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종교심이 깊은(?) 그녀는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white-trash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ugly하게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1988년 올림픽,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마주치는 일이 흔하지 않던 때였다. 잠실 주경기장에서 다이빙 경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티비에서 나오는 올림픽 경기를 직접 관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경기장에 가는 길에 여러 외국인을 마주쳤는데, 그게 또 그렇게 신기했다. 노란 머리, 파란 눈, 까만 사람, 새까만 사람, 더 새까만 사람… 갑자기 아버지가 특별히 더 새까만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깜둥이 좀 봐라~’ 라고 큰 소리를 내셨다. 내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나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교양이 없을 수가.

자신이 교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Turpin 여사는 병원 환자대기실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동시에 속으로는 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있다. 무심한 듯하지만 불쾌한 표정으로 Turpin 여사를 보던 Mary Grace는 느닷없이 책을 Turpin 여사의 눈에 집어 던지고 목을 조른다. 환상인듯 계시인듯, Turpin여사는 Mary Grace에게서 “Go back to hell where you came from, you old wart hog 흑돼지.” 라는 말을 듣는다. (Mary Grace라. 너무 대놓고 상징적인 이름 아닌가?)

집으로 돌아온 Turpin 여사는 warthog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Turpin 여사는 warthog가 하나님에게서 온 메세지 라고 확신한다.

농장에서 저녁 무렵 돼지를 씻기던 Turpin 여사는 하늘에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욥기 3장이 떠올랐다.

“Why me?” she rumbled. “It’s no trash around here, black or white, that I haven’t given to. And break my back to the bone every day working. And do for the church.” “How am I a hog? Exactly how am I like them?”

마지막으로 그녀는 울부짖는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시관대 Who do you think you are?”

그녀는 새끼 돼지들이 엄마돼지 옆에 모여있는 광경을 본다. 붉은 빛이 돼지들 사이로 퍼지고 있다. 암퇘지는 나지막하게 그르렁 소리를 낸다. 이어서 그녀는 환상을 보는 데, 한 무리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고 있다.

맨 앞에는 깨끗하게 목욕한 white-trash들이, 그리고 이어서는 흰색 가운을 입은 검둥이들이, 마지막에서야 세상에서는 존경을 받았던 Turpin 부인과 같은 교양 있는 백인들이 부끄러움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었다.

오코너는 남부의 작가인가? 그렇다. 당시 남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로 평범하고 평화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비일상적인 모습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 처럼 느껴져 섬찟하다. 그렇게 보면 오코너의 소설은 남부 스럽지 만은 않다.

download (1)

Flannery O’Connor (사진 출처: wikipedia)

Taylor Swift와 딸내미

swift14f-1-web

미국 10~20대 여자애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Taylor Swift. 특히 (그녀의 노래가 컨트리가 베이스라서 인지) 남부에서의 인기는 엄청나다. 특이하다고 생각이 든건, k-pop은 10~20대 여자 가수들은 30~40대 아저씨 팬덤을 공략하고 남자 가수들은 여심을 흔드는게 전략 포인트인데, 이동네는 오히려 반대로 10~20대 여자 가수들이 또래 여자아이들의 감성을 노래한다. 어찌보면 이게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30대 거무죽죽한 동양 남자가 뭐 Taylor Swift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겠나. 이건 아무래도 딸아이 때문이다. 어제 딸내미가 초등학교 가서 또래 친구 (Hailey라는 전형적인 남부 백인 여자아이) 한테 Taylor Swift 노래를 들었다며 유튜브로 틀어달라고 해서 같이 듣고 딸내미의 막춤을 감상해야 했다.

딸내미에 의하면 Hailey는 Taylor Swift의 노래를 다 외우고 있고, 특히 ‘Shake it off’를 좋아하는데, 자기는 ‘Out of the Woods’가 더 좋단다. 아직 7살 밖에 안된 유치원생 아이들이 틴팝을 좋아한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게 왜 더 나를 당황스럽게 했냐하면, 취향의 영역 (이를테면 음악/미술 등등…)이 지금까지는 부모의 영향을 더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이가 나나 부인의 일부분을 닮아가고 커가는게 뿌듯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그러한 영향을 외부에서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특히나 취향의 부분까지) 앞으로는 점점 더 커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기에 그 외부의 영향력이라는게 좀더 이질적이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은 덤.

이런 부질없는 생각 해서 뭐하겠나. 결국 자녀라고 해도 내것도 아닌데… 딸내미랑 좀더 이야기 나누고 대화라도 따라가려면 결국 딸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도 들으면서 같이 막춤도 쳐주는 수 밖에.

미국인들도 회사에서 안정될 때까지 자녀 계획을 늦춘다고…

700

Report Finds More Americans Putting Off Children Until Companies Are Ready

Originally posted 6/25 on facebook

직장이 자녀계획의 걸림돌이 되는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듯. 정치인들이 복지를 이야기 할 때 북유럽을 예로 드는 건 이유가 있다고 봄.

미국 오기 전에는 미국에는 아이 때문에 여자가 직장을 포기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환상이 있었는데, 내가 사는 남부 한정해서는 꼭 그렇지도 않은 듯…. 대부분의 청춘들은 직장이 잡히고 안정이 되는 시기까지 출산/결혼을 늦춘다. (결혼을 늦춘다는 의미가 실제적인 결혼인 동거를 늦춘다는 의미는 아님) 그치만 경제적으로 일찍 안정된 가정은 부인이 일을 그만두고 세명이상 자녀 양육에 전념하는게 유행도 있음. 좀더 여유가 있는 집은 동유럽출신 보모를 두는 럭셔리를 보이기도…

어쨌든 자녀 문제는 세계적인 이슈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