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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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핫한 뮤지컬을 꼽으라면 단연 해밀턴이다. 아래 첨부한 기사에 따르면 일주일에 60만불을 번다고. 매출이 아니다. 1주일 profit이 60만불(!)이다.

위의 기사에 동영상도 나오지만, 해밀턴 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다. 암표상에서 이 표를 구하면 $725불이라고 하고 (그것도 가장 뒷줄 자리), 줄을 서서 표를 사려면 36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뮤지컬이길래가 궁금한 사람은 예전에 내가 올린 아래 포스트를 참조하시길.

내가 놓친 2015년 미국 트랜드 6가지

갑자기 해밀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늘 밤 토니 상 시상식이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16개 부문 후보작으로 선정되어 후보수로 최다 기록을 세웠다. 최우수 작품상도 이미 예약해두었다. (이글은 지난 주말 페북에 올린 글이다. 해밀턴은 토니상에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아쉽게도 아직 나는 해밀턴을 못봤다. 안본게 아니라 못본거다. 궁금하긴 하지만 700불을 지불하거나 36시간을 줄을 설 정도는 아니다. 아마 몇년은 지나서 열기가 좀 사그라 들면 그때 가서야 좀 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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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of Us by Asne Seierstad

어제 올랜도 참사는 내게 큰 심리적 충격을 남겼다. 뉴스를 보는게 너무 피로하고 지친다. 주말이라 회사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다. 일이 있으면 뉴스를 외면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그래서 책을 펴들었다. 예전부터 읽으려고 사두었던 ‘One of Us’ 이다. 이 책은 노르웨이 혐오범죄를 다룬 르포타쥬이다. 이 사건은 올랜도 참사와 많은 점이 닮았다. 2011년 7월 22일 오슬로에서 32세 청년 아르네스 베링 브레비이크는 ‘모든 막시스트를 죽이겠다’고 하면서 노동당 청소년 summer camp를 습격한다. 수제폭탄, Ruger Mini-14, 글록 권총으로 중무장한 그는 청소년 77명을 살해하는 끔직한 범행을 저지른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 근본 주의자라고 주장했고, 노르웨이에서 무슬림을 추방하고,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를 죽여야한다고 했다.

올랜도 사건 보도에서 도망쳐서 왜 유사한 노르웨이 사건을 읽기 시작했을까? 잘 모르겠다. 혐오범죄, 테러 범죄를 더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게 생겼는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뉴스를 듣는 거 보단, 마음이 정돈된다.

‘One of Us’는 2015년 NYT 선정 best 10 book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르포타쥬의 masterpiece로 평하기도 한다. 기자이기도 한 저자 Asne Seierstad는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인터뷰를 하고 기록을 검토했다고 한다. (정작 범인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리고 범인의 출생부터 법정 공방까지는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심지어 책에는 사제 폭탄의 제조 과정, 범인이 칩거하면서 World of Warcraft에 빠져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씌였기에 논픽션 소설로 분류 될 수 있을 듯 하다. 비슷한 장르의 ‘In Cold Blood (냉혈한)’ (트루먼 카포티 작) 가 떠오른다. 실제 사건에 기반했지만, 책은 범죄소설의 플롯을 따른다. 사건이 끔찍하기 때문에 호러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차분한 서술이 오히려 공포감을 자아낸다. 첫장면부터 몰입감이 대단하다. 그리고 종종 이 사건이 실화라는 사실이 떠오르는다. 책을 읽는 중에 미국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참고로 아래에 뉴욕타임스 서평을 링크한다.

Can’t and Won’t by Lydia Davis

요즘에는 리디아 데이비스 Lydia Davis를 읽고 있다. 그녀는 미국에서 현재 활동하는 단편작가 중 가장 독창적인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폴 오스터의 전부인이고, 2013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Lydia Davis

New Yorker: Long Story Short (리디아 데이비스 소개 기사)

Lydia Davis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주에 NYT에 실린 싯다르타 무케르지 Siddhartha Mukherjee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그가 Lydia Davis의 책을 읽고 있다고 해서였다. (싯다르타 무케르지는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의 저자이다.)

이전에도 몇몇 영미권 작가들이 그녀를 추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아쉽게도 Lydia Davis는 아직 한국에 소개된 바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소설은 초단편 very short short story이다. 백일을 갓 넘긴 딸내미를 보다가 짬짬이 읽기에 딱이다.

집어든 책은 최신간인 ‘Can’t and Won’t’

굳이 이 책을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궁금해진다.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plot 이랄께 없다. 형식이 익숙하지 않아 적응하는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두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편(?)을 몇자 옮겨본다.

Ph.D.

All these years thought I had a Ph.D.
But I do not have a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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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ington

Now that I have been here for a little while, I can say with confidence that I have never been here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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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던 이야기 하나도 옮겨 본다. 최소한의 문장과 단어를 사용해 어떻게 이야기를 만드는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여자, 서른.

서른이 된 한 여자,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을 떠나기 싫다.
왜 내가 집을 떠나야 하는가? 여기는 부모님의 집이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한다. 왜 내가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다투고 서로에게 소리를 질러야 하는가?
그러나, 그 여자는 창문 앞에서 벌거벗는 것이 좋다. 그녀는 어떤 남자가 그녀를 바라봐 주는 정도는 좋겠다고 생각한다.

A Woman, Thirty

A woman, thirty, does not want to leave her childhood home.
Why should I leave home? These are my parents. They love me. Why should I go marry some man who will argue and shout at me?
Still, the woman likes to undress in front of the window. She wishes some man would at least look at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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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즐겁게 읽었던 piece도 한번 옮겨본다. 글쓰기에 대해 쓴 일종의 메타 소설 쯤 될 듯하다. 워낙 언어를 압축해서 썼기에 내 어설픈 번역으로 맛을 살리기 힘들긴 하다. 원문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글쓰기

계속해서 써가기에는 삶이 너무 고단하다. 예전에 삶은 쉬웠고, 때로는 즐거웠고, 그때는 쓰는 것이 즐거웠다. 물론 그때도 어려워 보이긴 했다. 지금와서 삶은 쉽지가 않다. 정말 고단해졌고, 비교하자면, 쓴다는 건 약간 우스워 보인다. 종종 현실이 아닌 것에 대해 쓴다. 그리고 내가 현실이 아닌 것에 대해 쓸 때, 종종 그것은 동시에 현실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아주 자주, 삶을 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 지금은 내가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었다. 자기 삶을 잘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는 대신에, 글쓰기를 그만두고서 나는 내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삶 자체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지도. 내가 좀더 현명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더이상 쓰지 않는 것이다. 내가 대신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다.

Writing

Life is too serious for me to go on writing. Life used to be easier, and often pleasant, and then writing was pleasant, though it also seemed serious. Now life is not easy, it has gotten very serious, and by comparison, writing seems a little silly. Writing is often not about real things, and then, when it is about real things, it is often at the same time taking the place of some real things. Writing is too often about people who can’t manage. Now I have become one of those people. What I should do, instead of writing about people who can’t manage, is just quit writing and learn to manage. And pay more attention to life itself. The only way I will get smarter is by not writing anymore. There are other things I should be doing inst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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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데이비스는 프루스트 Proust와 플로베르 Flaubert의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책을 읽다보면 번역을 한번 거친 영어 문장을 읽는 기분도 든다.

문장은 생각보다 술술 읽히는 데, 리듬감이 있어서 그렇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지 않고서는 리듬감이 나올 수 없다.

어쩌면 평생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도전하는 것 보다는 리디아의 책을 읽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길이는 짧으니까.

괜찮아 – 한강

[ 괜찮아 ] —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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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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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 덧: 시에서 한강은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자 며칠 뒤에 울음을 그쳤다는데, 백일이 갓지난 우리 아가는 언제쯤 울음을 그치려나… 어쩌면, 엄마/아빠가 울음을 그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를 일이다.

The Barber by Flannery O’Connor

이전 글에 이어서, 플래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의 다른 단편, 이발사 The Barber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한다. 보통은 책읽고 기록을 남길때, 줄거리 요약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데, 요새 같은 때에 이 소설은 줄거리 요약 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대학 교수인 Rayber는 애틀란타에 있을 선거 Democratic White Primary 이야기를 이발사와 한다. 리버럴을 자처하는 그는 이번 선거에서 Darmon을 뽑는다고 했고, 이에 이발사는 Rayber를 ‘검둥이 옹호자’로 매도한다. Rayber는 자신은 ‘검둥이 옹호자’도 ‘백인 옹호자’도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발사는 Hawkson을 지지한다. 이발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Hawkson을 선동가 demagogue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쇼맨십이 대단한 사람이다. 이발사는 Hawkson이 백인 구역에서 검둥이를 쫓아내고, 번드르하게 호의만 베푸는 헛똑똑이들을 혼쭐 내며, 자기들을 돈 벌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 1947년에 발표된 소설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장면들인지.)

Rayber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오고 논리적인 반박문을 준비한다. 친구는 이발사와 논쟁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Rayber는 그만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발소에서 준비한 연설문을 읽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Rayber는 격분한 나머지, 이발사의 멱살을 잡고 말한다. “내가 니 둔해 빠진 정신을 바꾸려고 이러는 줄 알아? 도대체 날 뭘로 보고? 내가 니 빌어먹을 무식함을 어떻게 해보려고 이러는 거 같애?”

그리고서 Rayber는 뛰듯이 그자리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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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nery O’Connor (출처: wikipedia)

Revelation by Flannery O’Connor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지역적인가? 어떤면에서 그러하다.

Flannery O’Connor의 계시Revelation을 읽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남부 사투리, 노예 해방 이후의 시대 상황, 면화 농사가 기계화 되기 시작하던, 그시절 조지아를 생생하게 그린다.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은 읽기가 그다지 즐거운 책은 아니다. 짧고 간결한데, 읽고 나면 찝찝한 느낌이 남는다. (Revelation은 그중에서 그나마 덜 찝찝한 작품이다.) 그녀는 주로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묘사한다. 인종차별, 종교적 위선을 가진 조지아 시골 사람들 이야기는 극단적이지만 묘하게도 나를 포함한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로 읽힌다.

소재나 분위기, 찜찜한 결말을 감안해도 그녀의 단편을 읽는 건 쉽지 않다. 읽다보면 시골사람들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n-word와 인종차별 발언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여담인데, 나는 영미 소설을 읽을 때,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버릇이 있다. 처음에는 영어 공부 차원에서, 나중에는 읽으면서 문장의 리듬감이나 속도감을 느끼는게 좋아서 그런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Revelation을 읽을 때는 소설 곳곳에서 n-word와 politically correct 하지 않은 대사들이 자주 등장했고, 급기야 아내가 오코너 소설 소리내어 읽기를 금지시켰다. 뒷부분은 눈으로 읽어야 했다.

소설은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도덕적으로, 겉모습으로, 교양측면에서 모든 면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Mrs. Turpin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아, 정확히는 Mrs. Turpin의 시각을 묘사하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어쨌든 그녀는 병원 진료 대기실에 앉아서 주위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종교심이 깊은(?) 그녀는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white-trash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ugly하게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1988년 올림픽,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마주치는 일이 흔하지 않던 때였다. 잠실 주경기장에서 다이빙 경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티비에서 나오는 올림픽 경기를 직접 관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경기장에 가는 길에 여러 외국인을 마주쳤는데, 그게 또 그렇게 신기했다. 노란 머리, 파란 눈, 까만 사람, 새까만 사람, 더 새까만 사람… 갑자기 아버지가 특별히 더 새까만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깜둥이 좀 봐라~’ 라고 큰 소리를 내셨다. 내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 나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교양이 없을 수가.

자신이 교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Turpin 여사는 병원 환자대기실에서 이런저런 수다를 떤다. 동시에 속으로는 그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고 있다. 무심한 듯하지만 불쾌한 표정으로 Turpin 여사를 보던 Mary Grace는 느닷없이 책을 Turpin 여사의 눈에 집어 던지고 목을 조른다. 환상인듯 계시인듯, Turpin여사는 Mary Grace에게서 “Go back to hell where you came from, you old wart hog 흑돼지.” 라는 말을 듣는다. (Mary Grace라. 너무 대놓고 상징적인 이름 아닌가?)

집으로 돌아온 Turpin 여사는 warthog라는 단어에 집착한다. Turpin 여사는 warthog가 하나님에게서 온 메세지 라고 확신한다.

농장에서 저녁 무렵 돼지를 씻기던 Turpin 여사는 하늘에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욥기 3장이 떠올랐다.

“Why me?” she rumbled. “It’s no trash around here, black or white, that I haven’t given to. And break my back to the bone every day working. And do for the church.” “How am I a hog? Exactly how am I like them?”

마지막으로 그녀는 울부짖는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시관대 Who do you think you are?”

그녀는 새끼 돼지들이 엄마돼지 옆에 모여있는 광경을 본다. 붉은 빛이 돼지들 사이로 퍼지고 있다. 암퇘지는 나지막하게 그르렁 소리를 낸다. 이어서 그녀는 환상을 보는 데, 한 무리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올라가고 있다.

맨 앞에는 깨끗하게 목욕한 white-trash들이, 그리고 이어서는 흰색 가운을 입은 검둥이들이, 마지막에서야 세상에서는 존경을 받았던 Turpin 부인과 같은 교양 있는 백인들이 부끄러움 가운데서 걸어가고 있었다.

오코너는 남부의 작가인가? 그렇다. 당시 남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로 평범하고 평화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평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평범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비일상적인 모습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 처럼 느껴져 섬찟하다. 그렇게 보면 오코너의 소설은 남부 스럽지 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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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nnery O’Connor (사진 출처: wikipedia)

This free online encyclopedia has achieved what Wikipedia can only dream of

인터넷 세상은 정보의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기사는 온라인 백과사전의 모범으로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를 소개한다. (백과사전 링크)

캡처

This free online encyclopedia has achieved what Wikipedia can only dream of (Quartz, 2015년 9월 21일자)

오픈소스 백과사전인 SEP가 authoritative, comprehensive, up-to-date 이라는 세마리 토끼를 동시에 어떻게 잡았는지. 위키피디아와 어떻게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 흥미진진하게 잘 보여주는 기사.

기사 내용도 내용이지만, 깔끔하고 쉽게 그러면서도 깊이있게 잘쓴 영문 기사 자체도 멋져서 공유.

왜 다이어트는 우리를 살찌게 하는가?

애초에 살을 빼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오히려 살만 더찌고 건강만 해친다고 한다. (아래에 어제일자 NYT 기사 참조)

참고로 며칠전 NYT에서 살빼기 리얼리티쇼 ‘The Biggest Loser’의 참가자들의 다이어트 이후를 조사한 기사를 냈다.

요약하자면, 참가자의 대부분이 6년 후에는 원래 몸무게로 돌아왔으며, 몸무게를 유지한 경우도 체중 유지를 위해서 일반인 보다 훨씬 적은 양을 먹고 있다는 것. 원인은 그들의 신진대사량과 식욕을 제어하는 호르몬인데, 신진대사량을 재어보니, 비슷한 체형의 사람들보다 하루에 200-800 칼로리 정도 적었다고 한다.

캡처

오늘 칼럼을 기고한 Aamodt 박사에 따르면, 그것은 당연하다고. 살빼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호르몬의 문제라고 한다.

설사 다이어트에 성공했다고 해도, 1- 6년 정도 길게 보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고 결국은 원래 몸무게로 돌아가거나, 심지어는 더 찌게 된다고 한다. (관련 사례는 기사 참조) 이유는 스트레스와 폭식. 그녀는 오히려 다이어트가 살을 찌운다고 주장한다. 천천히 빼고 빨리 빼고는 별 상관이 없다고.

물론 어떤이에게는 다이어트가 미관상의 이유가 아닌 건강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비만보다, 운동부족, 고혈압, 흡연, 저소득, 외로움 같은 요인이 건강에는 더 해롭다고 한다.

그러니까 결론은 애초에 불가능한 다이어트에 힘빼지 말고, 차라리 건강한 습관을 들이는 데에 집중하자는 이야기. (꾸준한 운동, 건강한 음식 먹기 등등…) 이게 체중 유지에도 도움이 되고, 설혹 안되더라도 건강하게 사는데 보탬이 된다고…

찾아보니 관련한 TED 강연과 책도 있다.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고, ebook으로는 볼 수 있는 듯 하다.

TED링크(한글자막)

책: Why Diets Make Us Fat: The Unintended Consequences of Our Obsession With Weight Loss (6월 7일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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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 어쨌든 우울하다. 그럼 나는 배나온 채로 계속 살아야 한단 말인가. 꾸준한 운동과 건강식 먹기는 다이어트 보다 힘들던데. ㅠㅠ

Button, Button by Richard Matheson

며칠전에 공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을 언급한 김에 생각난 이야기.

스티븐 킹은 호러 소설로 유명하지만, 순문학도 썼고 여러장르에 걸처 다작을 한 작가이다. 그 스티븐 킹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로 리처드 매드슨을 꼽은 적이 있다. (출처) 스티븐 킹은 커리어도 리처드 매드슨과 유사하게 쌓았는데, 둘다 헐리우드에 작품이 영화화 되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호러 소설로 유명하고, 동시에 다양한 장르에 손을 댓다.

한국에서 리처드 매드슨은 그다지 유명한 이름이 아니지만,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한번 쯤 들어 봤을 것이다. 매드슨의 대표작이 바로 ‘나는 전설이다’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 장르를 탄생시킨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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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슨은 또한 TV 시리즈 Twilight Zone의 메인 작가로 유명하다. Twilight Zone은 우리나라에 ‘환상특급’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 었다. 나는 어린 시절 ‘환상 특급’을 즐겨 보았는데, 지금도 몇개의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이들이 자격이 없는 부모를 바꾸는 ‘Children’s zoo‘ 에피소드라든지… 꿈을 주입시켜주는 기계에서 잠을 자는 ‘Dream for Sale‘ 에피소드 라든지… (내가 알기로는 이 에피소드가 영화 토탈리콜과 매트릭스의 원조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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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매드슨이 쓴 작품 중에 Button, Button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Twilight Zone의 한 에피소드로 제작된 바 있고, 몇년전에는 ‘더 박스’라는 카멜롯 디아즈 주연의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아쉽게도 영화는 망작이었다고.

Button, Button의 Twilight Zone TV 시리즈 버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Button,Button

어느날 한 부부의 집에 박스가 배달된다. 그 박스 안에는 이상한 버튼과 함께 쪽지가 남겨져 있다. Mr. Steward가 곧 방문할 것이라고. 이윽고 왠 신사가 초인종을 누른다. 그 남자는 부부에게 버튼을 누르면 두가지 일이 일어날 것인데, 첫째 당신들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을 것이고, 둘째 당신들은 20만불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다.

남편인 Arthur는 그 제안을 무시했지만, 부인 Norma는 계속해서 버튼을 만지작 거린다. 버튼을 만지작 거리다가 Norma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한다.

이 버튼에 생명이 달린 사람의 삶의 무게에 대해서 논한다. 그는 어쩌면 머나먼 중국에 사는 농부, 삶에 미련이 없을 만큼 오래 산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미 활력이 다 사라진 말기 암환자일 수도. 그리고 고작 버튼인데 눌러봐야 별일이 있겠나. 그리고 Arthur는 […]

(결과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글의 말미에 따로 적는다.)

스티븐 킹 말고도 갑자기 이 에피소드가 생각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최근 옥시 레킷벤키저 사태를 보면서 영국에 사는 레킷벤키저 사람들에게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Norma의 버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실감도 안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다가 버튼을 누른 Norma나 레킷벤키저 사람들이나 다를게 무엇이겠는가.

Button, Button에서 Norma는 우울한 결말을 맞는다. 현실에서 레킷벤키저 사람들의 결말은 어찌 될지 두고볼 일이다.

이야기로 돌아와서 마무리를 짓자. TV에서와 원작 소설은 결말이 조금 다르다. 원작소설 링크도 올려 둔다. (영어 버전) 분량도 9페이지 밖에 안되고 영어도 평이하니까 도전해볼만 하다. 참고로 원작은 매드슨이 플레이보이지에 기고한 소설이다. (험험… 플레이보이가 사진 감상 만을 위한 잡지는 아니다.)

Button, Button by Richard Matheson [PDF]

——— (여기서 부터 스포일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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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버전에서 Arthur는 버튼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런데 Norma는 버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튼을 찾는다. 그리고 고민 끝에 버튼을 누른다. 다음날, Mr. Steward가 20만불이 든 서류가방을 들고 집을 방문한다. Norma는 Steward에게 이제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Mr. Steward는 버튼은 초기화 될 것이고, Norma 부부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달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고 떠난다. (허걱)

소설은 결말이 다르다. 소설에서 Steward가 제시한 금액은 20만불이 아니고 5만 불이다. 그리고 Norma가 버튼을 눌렀을 때 죽는 사람은 Arthur이다. Arthur 앞으로 남겨진 생명보험 보상금이 5만 불이었던 것이다. 전화로 Norma가 Steward에게 모르는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었냐고 따지자, Steward는 “Did you really think you knew your husband?”라고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