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와 폭력에 대하여

NYT에 실린 Nicholas Mirzoeff 교수 (NYU media학과) 의 대담을 공유한다. 요약과 함께 내 생각이 섞여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참조할 것을 부탁드린다.

시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시위가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라는 보도를 자주 듣는다. 그 경우, 시위가 폭력적이다, 아니다의 기준은 시위과정에서 기물 파손이 있었는가, 시위대와 경찰 간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는가,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했는가에 있다.

그러나 시위에 있어서 폭력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주위에서 같은 뉴스 보도를 보고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매일 보지 않는가.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시민은 정부의 폭력에 대해서 관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타당하다. 사회 계약의 관점에서 시민은 ‘보호’, ‘안전’, ‘치안’을 대가로 정부에게 폭력의 독점권을 양도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치안’유지를 위해 사회의 ‘안정’을 위해 규제를 하고 공권력을 행사한다.

시민들이 정부의 폭력 독점을 인지하는 시점은 정부의 정당성이 약화되었을 때이다. 대표적인 예로 ‘독재 정권’에 대한 시위와 ‘식민 정권’에 대한 항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도시락 폭탄 투척 사건을 보자.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이는 명백한 폭력이고 테러 행위이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시민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조선사람들은 이를 테러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지 않는 (나를 포함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윤봉길의 행위를 의거로 본다.

동일한 관점을 ‘민주화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부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시위대는 폭도들이고, 이를 진압하는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한 질서 유지 활동으로 읽힌다. 그 반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이미지가 이러한 상반된 시각의 대립과 균형(?)을 한번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를 테면 역사를 바꾼 보도 사진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최근 시리아 난민을 주목하게 만든 Aylan Kurdi의 사진이 그러하고, 한국의 예로는 김주열의 주검사진 (또는 소문)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도 사진은 정치적이다. (여기서 나는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가치 중립적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시선과 메세지를 담기 마련인데, 폭력의 독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피해자의 사진은 약자의 시선을 보여주고, 폭력을 독점하는 정부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정부의 폭력 독점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폭력 독점을 견제하는 대표적인 예는 미국 수정헌법 2조이다. 그리고 수정헌법 2조는 미국에서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석이 되고 있다.

나는 수정헌법을 둘러싼 논쟁의 옳고 그름과 이론적인 배경을 떠나서,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총기 소유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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