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를 외치는 사람들

그저께 (7/26) 페북에 올린 글을 저장함.


 

민주당 전당대회가 어제 시작되었다. 공화당 전당대회와 달리 심심하게 가지않을까 하는 건 나의 기우였다. 첫날부터 뜨겁다. 어제의 주인공은 버니 샌더스 의원.

어제만 놓고 보면, 전당대회의 주인공은 힐러리가 아니고 샌더스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당대회당에서 버니를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서, 버니 이름을 외쳤고 심지어는 힐러리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야유(!)를 퍼부었다.

첨부한 동영상은 전당대회 오전 포럼에서 샌더스가 지지자들에게 힐러리를 지지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다. 열혈 샌더스 지지자는 울기도 하고, 힐러리 이름이 나오면 ‘Boo’를 외치며, ‘We want Bernie!’를 외친다.

어제의 하일라이트는 마지막 순서인 샌더스의 연설. 나는 중계방송을 지켜보았는데, 샌더스 지지자의 열기에 깜짝 놀랐다. 샌더스가 단상에 오르자, 관중의 함성이 극에 달했고, 몇분 동안 (시간을 안재봤는데 정말 길게 느껴졌다) 그 함성에 샌더스는 연설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와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지만, (대표적으로 자유무역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당선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인권과 환경문제에 있어서 힐러리와 견해를 같이한다고 했다.

형식상 샌더스 의원의 힐러리 지지 선언으로 민주당 경선이 마무리를 지어졌다. 그러나 열성 버니 지지자들은 여전히 힐러리에 반발하고 있고, (그들은 힐러리가 전쟁광이며 부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샌더스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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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크루즈와 마이크 펜스

어제 트럼프의 후보수락 연설 전에 페북에 올린 포스트를 저장해 둔다.

 


 

예상대로 올해 공화당 전당대회는 뉴스 꺼리가 풍성하다. 멜라니아 트럼프의 표절부터 테드 크루즈의 잔치집 찬물 끼얹기까지. 물론 하일라이트는 오늘 저녁 트럼프의 후보수락 연설이 될 가능성이 높다.

Mr_Donald_Trump_New_Hampshire_Town_Hall_on_August_19th,_2015_at_Pinkerton_Academy,_Derry,_NH_by_Michael_Vadon_02

어제 보여주었던 테드 크루즈의 행동으로 언론들이 뜨겁다. 크루즈가 한 행동은 잔치집에 가서 축하의 말 대신에 침뱉고 나온 모습인데, 이보다 더 재미있는 기사가 어디있겠는가. 물론 막판까지 후보자리를 두고 다투었던 경쟁자가 반드시 지지 선언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당대회는 분위기 띄우기 행사고, 후보를 지지 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불참을 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존 메케인, 부시 부자, 밋 롬니, 존 케이식은 이번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공화당 전당대회 단골 연사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미식축구 스타 팀 티보도 이번 행사에는 불참이다. 그런데 크루즈는 축하에 자리에 나와서 트럼프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1월 있을 선거에 꼭 참석해서 양심에 따라 투표하십시요.’ 라고 했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청중은 야유를 했다.

동영상: Cruz Booed After Not Endorsing Trump

캡처

크루즈는 역시 크루즈다. 그는 언제나 야심이 가득한 사람이었고 항상 굽히지 않는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번 선거를 오랜 시간 준비해왔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가능한한 모든 원리주의자의 표를 끌어들인다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트럼프에 대항할 마지막 카드로까지 여겨 졌다. 그는 전략대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의 표를 기반으로 하여 작은 정부 주의자, 극단적인 리버테리안들까지 지지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 경선에서 트럼프는 선거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결과적으로 크루즈의 전략이 통하지 않는 선거가 되었을 따름이다. (참고로 크루즈에 관해서는 몇차례 포스팅 한적이 있다. 관련글 링크)

원래 전당대회는 마지막날 후보 수락 연설이 하일라이트이고, 그 전까지는 러닝 메이트가 분위기를 살리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번에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마이크 펜스는 참 조용하다. 오히려 트럼프의 아들들과 부인, 그리고 어제는 크루즈가 뉴스의 중심이었다. 마이크 펜스라는 이름은 나도 처음 들어보았는데 그래서 관련 기사를 좀 찾아봤다. 아래는 펜스 주지사의 삶을 정리한 NYT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펜스는 보수주의 기독교 가치관을 신념으로 하는 정치인이다. 펜스가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한 것은 작년 인디아나 주에서 낙태를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 시키면서이다. 법안은 산모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인종, 성별, 유전병 (다운 신드룸 같은) 때문에 낙태 시술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연히 이 법은 연방 대법원에 의해서 위헌 판정을 받았고 지금은 무효화된 상태이다.

낙태 이슈에 대한 논쟁은 예나 지금이나 미국 정치에서 뜨거운 이슈이다. 예전에 낙태와 관련해서 정리한 적이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은 링크를 참조하길 바란다. (낙태 이슈에 관한 논점들)

어떤 면에서 크루즈와 펜스는 정치적인 노선이 같다. 둘은 보수 복음주의 기독교인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종착점이 자신의 야심인 크루즈와 달리 펜스는 기독교 가치관을 수호하는 것 자체가 지향점인 사람으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펜스는 2012년 인디애나주 주지사로 선출된 이후 매년 다양한 형태로 낙태 제한하는 법을 제안해왔다. 그리고 2015년 법안 통과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는 2015년 법을 통과시키면서 “소중한 아이들과 어머니들, 그리고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길 기도하면서 법을 통과시켰다. (I sign this law with a prayer that God would continue to bless these precious children, mothers and families.)” 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대다수 보수 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이를 테면, 그는 1973년 대법원의 Roe v. Wade 판결을 노예를 사유재산으로 본 1857년의 Dred Scott 판결과 같은 수준의 오점라고 믿는다. 그는 학부시절 예수를 만나고 회심한 이후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바쳤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소위 말하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심지어 그의 앞에서는 사람들이 비속어나 욕을 사용하기도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술자리가 있으면 반드시 부인을 동석시키며, 원칙에 벗어나는 일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면 펜스의 원칙주의는 크루즈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 동기 측면에서는 전혀 다르다. 크루즈에 관련해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크루즈는 대학 때도 야망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데이트 첫 만남에서 항상 상대의 SAT 성적을 묻고, 집안 배경을 확인했다고 한다. 크루즈는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전국 토론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력이 있다. 그는 꾸준히 엘리트의 길을 걸어 왔고 성공을 위해 달려온 전형적인 인물이다. 성공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그의 성격은 워싱턴에서도 그를 왕따로 만들었고, 항상 아웃사이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동시에 확실한 색깔 때문에 원칙주의자들에게는 지지를 받아왔다.

다시 트럼프와 general election 이야기로 돌아오자. 사실 트럼프는 점잖은 기독교인에게는 반감을 주는 인물이다. 그는 상당히 세속적인 사람이고, 결과적으로는 공화당 경선에 승리했지만, 왠지 보수 복음주의자들과는 어우러지는 그림이 잘 안나온다. 대표적으로 종교색이 짙은 유타주는 트럼프를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 그들의 표심을 대표하는 롬니는 트럼프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물론 유타는 한국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분류되는 몰몬교이다. 그러나, 미국 기준으로 몰몬교는 복음주의 기독교와 보수적인 가치관을 공유한다.) 트럼프가 펜스를 러닝메이트로 선정한 배경에는 이러한 계산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보아서는 트럼프와 펜스 역시 상당히 이질적인 조합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어제 저녁 순서에 자신의 자식들의 찬조 연설을 몰아 놓고서 하일라이트 처럼 순서를 짰다. 부통령 후보는 안중에도 없다. 누가봐도 트럼프가 자기 가족을 띠우기에 집중하는 모습이 선명하다.

트럼프가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은 미국인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거부감을 덜어보고자 펜스를 불러오고서 들러리만 세운다. 아마도 딸 이반카를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싶은게 트럼프의 본심이지 않았나 싶다. 하긴 지금의 그라면 뭔들 못하겠는가.

Ivanka Tr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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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연재: 4.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이번 달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글을 공유한다. The American Interest에 실린 조너선 하이트 교수의 기고문. 조너선 하이트는 NYU의 사회 심리학자이고, 한국에도 소개된 책 ‘바른마음’의 저자이기도 하다.

When and Why Nationalism Beats Globalism, JONATHAN HAIDT, 2016년 7월 10일자

Jonathan Ha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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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내 포스트는 요약이나 번역이 아니고, 잊기전에 감상을 기록해 두기 위한 메모에 불과하니 내용에 관심있는 분은 본문을 읽을 것을 부탁드린다.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기고문에서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커지고 있는 반이민정서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반이민정서를 단순히 무지나 혐오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가치관의 표현으로 읽는다. 즉 ‘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와 ‘nationalism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읽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남수단에서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과 우리동네 앞 수영장 안전수칙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과의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조너선 하이트에 따르면, 사회가 부유해지면 새로운 가치관이 부상한다. Young urban elite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전통주의 traditional values’ 보다는 ‘세속주의 secular rational’를 ‘생존을 위한 삶 survival values’보다는 ‘자기 표현 self-expression’과 ‘해방 emancipative values’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신뢰가 굳건하고, 범죄율이 낮으며,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 사람들이 그러한 안정을 default로 여기기 시작하면, 상호존중과 자유, 그리고 신뢰에서 오는 낮은 거래 비용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 풍요가 소중해진다.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cosmopolitanism’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가치일 수 밖에 없다. (하이트 교수의 이 이야기는 잉글하트의 이론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Cosmopolitan들은 존레논의 ‘imagine’이 묘사하는 세상을 천국으로 여긴다.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멀리갈 필요도 없다. 이것은 내가 20대에, 그리고 30대 초반에 꿈꾸던 세상이었다. 군대를 제대할 무렵, 나는 세상에 나가서 뭐를 해야하나 싶었다. 그때 막연하게 넓은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제대 후에 일년간 어학연수도 갔고 몇달간 유럽배낭여행도 했다. 이후에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이어졌다.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지만 미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능력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가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때의 생각과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 내가 미국에 살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시 민족주의로 돌아오자. 어떤 면에서 그들의 (때로는 과격한) 행동을 단순히 인종주의자의 편견으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 민족주의자들에게 애국 patriotism은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이다. 그들에게 민족과 문화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에 도덕적으로 결단한 사람들에 가깝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글에서 말하는 Nationalism은 도덕적 근본주의에 가까운데 어쨌든 여기서는 민족주의자로 표기하기로 하자.)

유럽은 지난 몇년 동안 밀려오는 이민자의 물결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물에 빠져 죽어서 해안으로 밀려온 시체들과 트럭과 기차에 숨어들어오는 사람들의 비극을 지켜보고 있자면 절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거기에 아파하며, 외부인을 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cosmopolitan’의 시각을 가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메르켈 총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이민자들이 들어와서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이 흐뜨러지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민족주의자의 시선이다. 헝가리에 몇년간 살았던 한 친구는 나에게 난민들이 기차역에 노숙을 하는 모습에 일종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친구에게 뉴스에 나오는 기차역은 익숙한 일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만약이지만, 이웃 나라에서 전쟁이 나서 거지꼴을 한 수천명의 외국인들이 서울역에 천막을 치고 눌러 앉은 모양새다. 게다가 그들중에 일부는 잠재적인 테러범으로까지 여겨지는 상황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아주 극단적이지는 않아서 두가지 모습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다. 본인의 상황에 따라, 또 민감한 이슈에 따라, 두가지 모습 사이 어디 쯤에 있는게 보통이다.

민족주의자들이 지키고자하는 가치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적인 신념일 수 있고, 어떤이에게는 가부장적인 가치일 수도 있다. 만약 이러한 가치가 ‘인종’이나 ‘민족’ 또는 ‘피부색’과 결합이 된다면 강렬한 인종주의의 모습을 띠게 된다.

민족주의자들이 단순히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르다고 다른이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은 도덕적인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면 종종 극단적으로 돌변한다. 그 도덕적 가치는 그룹에 따라 다르다. ‘동성연애’, ‘이슬람’, ‘페미니즘’, ‘개방연애’, ‘환경보호’, ‘마약’, ‘술’, ‘성적 방종’ 등등.

여기서 하나 집고넘어 갈 부분이 있다. 민족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출발점이 다른 사람들이다. 보수주의자는 말하자면 status quo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다수 교육받은 사람들이고, 극단적인 상황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반면 민족주의자는 자신이 믿는 가치의 수호를 위해 극단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마무리를 짓자. 오늘은 반이민정서와 cosmopolitanism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러한 생각의 계기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이다. 아무래도 나는 여전히 cosmopolitan에 로망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리고 타국에서 minority의 삶을 사는지라…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과 유럽 극우민족주의자의 부상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은 여러가지 결을 가진 이야기이다. (따져보자면 두가지 사건을 하나로 묶어 보는 것도 논리적 비약을 감수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을 한가지 관점으로만 이해한다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예전에 브렉시트를 Euroseptic의 관점에서 읽기도 하고, 경제적 불평등으로 이해해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EU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브렉시트를 읽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지만 여러 각도에서 다시금 생각해보는게 내게도 유익했다.

어쨌든 시절이 시절인지라, 내가 믿는 가치가 가치인지라, minority로 또는 경계인으로 살아갈 숙명을 가진 내 아이들에게는 그게 또 겪어가야할 일인지라, 요즘 뉴스를 보는 일은 참 씁쓸하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브렉시트 연재: 3.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오늘 포스트에서는 브렉시트를 통해 불평등 이슈를 생각해보려한다. 말하자면, 대중은 왜 엘리트 정치인(또는 기성정치인)을 불신하고 트럼프나 보리스 같은 사람들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나는 지금까지 브렉시트에 대한 생각정리를 하면서 주로 EU의 꿈 vs. 대영제국의 꿈이라는 관점에서 포스팅을 해왔다.

나는 브렉시트를 Eurosceptic의 성과라는 관점에서 읽는다. 그러나 Eurosceptic이 (경제적으로는) 불평등 이슈와 (사회적으로는) 반이민정서에 기대고 있다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적인 EU 이슈와 달리 불평등 이슈는 전세계가 다같이 겪는 문제이기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가깝게 다가온다.

생각을 이어가기 위해, 어제 읽은 기사 중에서 하나를 인용 한다.

기사는 작년 9월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실험에 주목한다. 이 실험은 최근 행동경제학쪽에서 주목받고 있는 레이먼드 피스먼 교수가 주도했다. (자세한 내용은 논문 참조: 링크) 실험은 dictator game을 살짝 바꾼 형태이다. (Dictator game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한글 블로그, 영문 위키피디아)

Dictator game은 경제활동이 개개인의 논리적인 이윤추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피스먼 교수의 실험은 이를 조금 바꾸어서, 경제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효율성과 공평함 둘중에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이 파이를 키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효율성의 관점) 아니면 파이가 작아지더라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경제적 평등의 관점) 에 대한 질문이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실제 돈을 주어주고서 (정확하게는 현금등가물) 나누면 나눌 수록 전체 금액이 줄어드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전혀 나누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일정부분의 돈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

결과가 흥미롭다. average American의 경우는 절반 정도가 효율성보다는 공평함을 선택했다. 그러나 예일대 법대 생의 경우는 80% 정도가 효율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UC버클리 학부생은 그 중간 정도이다.

피스먼 교수의 결론은 이렇다.

“엘리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수록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시스템이 그 사람에게 호의적일 수록 배분의 문제에 덜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자유무역’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미국 정치권은 큰정부 vs. 작은 정부에 대한 논쟁 보다는 ‘자유무역’ 논쟁이 더 치열하다. 심지어 데이비드 브룩스는 자유무역 찬반을 기준으로 향후 정치권이 재편될 것을 예상할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와 샌더스는 경제 공약으로 ‘보호무역’을 들고 나왔다.

여론조사를 봐도 ‘보호무역’ 선호가 뚜렷하다. 최근 Brooking Institution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52%의 미국인이 무역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답변을 했다.

캡처

영국의 경우를 보면 브렉시트파는 엘리트가 말하는 무역이익, 즉 EU와의 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은 믿지 못하겠으며, 그보다는 EU 분담금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무역’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관점은 분명하다. 경제학에서 ‘자유무역’이 상호간에 이익이라는 것은 기본 지식에 속하며 이론적으로도 탄탄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효율성을 기본 원리로 두고 있는 경제학에서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TPP를 예로 들어보자.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의 보고서에 따르면, TPP는 2030년까지 미국의 소득을 $131B을 늘일 것이라고 한다. 미국 GDP의 0.5%이다. 경제에서 0.5%는 엄청난 숫자다. 협정하나로 가져올 수 있는 이득으로 보자면 말이다. 그리고 53,700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그만큼의 일자리가 더 생길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니까 순증가량으로 보면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난다.)

매해 6천만명의 사람들이 이직을 하는 미국에서 5만명은 정말 작은 숫자다. 그러나 그 5만명에게는 생계가 달린 일이다. 그리고 TPP가 진행되면 그들과 그 가족/친척들은 가장 강력한 트럼프 지지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경제발전을 포기하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정책결정자 누구도 그러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게다가 포기의 결정이 옳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을 진지하게 보다보면, 과연 그러한 견고한 모델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제 글을 마무리 지어보자. 내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생각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에 대해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공학/경영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효율성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익숙하다. 물론 내가 엘리트라고 느낀 적은 없지만, 최소한 시스템에 어느정도 적응을 하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지금까지 시스템에 우호적인 생각만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 덧: 미국을 기준으로 많은 예를 들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브렉시트와 ‘자유무역’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다. 오히려 영국은 항상 자유무역을 옹호해왔다.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일부 (특히 지식인 층에서) 영국인들은 영국이 EU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비EU 국가와 더 많이 교류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를 선택한 대다수의 저소득 영국인들은 영국과 EU와의 무역으로 얻는 이득을 믿지않았다. 나는 브렉시트가 영국을 더 적극적인 ‘자유무역’ 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전망에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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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연재: 2.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Vox기자 Amanda Taub의 NYT 기고문을 공유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지난주 영국에 초점을 맞추던 외신들이 이제 EU 내부의 문제를 조명하는 분위기이다.

Euroseptic, 즉 EU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은 EU가 비민주적이며, 각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이나, UKIP의 패라지, 그리고 이번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이 대표적인 Eurosept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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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극우 포퓰리스트로 보는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들을 때마다 Euroseptic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는 듯한 찜찜함이 남는다.

개별국가의 시각에서 EU를 바라보면 EU는 대단히 비민주적으로 작동한다. 영국을 예를 들자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 (이를테면, 그리스를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들…)에 대해 정작 영국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 영국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의사결정을 영국사람이 하겠다는 요구는 정당하며 지극히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는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고, 이익단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미디어와 공론장, 그리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경우에는 청원서를 접수하거나, 헌법소원을 하거나, 아니면 시위에 참가하거나, 이런 행위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EU는 그런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심지어는 영국민 자신에게 중요한 큰 결정에 마저 그러하다.

European Parli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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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첨부한 기사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왜 EU는 비민주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까?

첫째, EU는 원래 그렇게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럽의회의 구성원들은 선거로 선출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technocrat, 즉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개별 국가의 이익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EU 관점에서 최적의 결정을 할 것을 요구 받는다.

EU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럽의 평화와 공존, 그리고 하나된 유럽이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과 개별국가의 이익은 상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나 유럽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는 더더욱 그러하다. EU의 전문가 중심의 의사결정은 이러한 목적에 잘 부합한다.

기사는 두번째로 EU의 지나치게 약한 권력을 지적한다. (헤깔리기 쉽지만, 강한 권력이 아니다.) 유럽 난민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EU는 각 나라에 난민 수용을 강제로 배정할 수 없다. 유럽의회에서 협의를 거친 이후, 각 나라와 다시 협상하고, 부탁하며, 양해를 구해왔다. 유럽 각국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자기 나라가 떠안기는 거부하고 서로 모른척해왔다. 그리고 그 협상의 결과에 대해 개별 국가들은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과 각국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포스팅한 바 있다. European Union을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유럽연합과 각국 정부는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관계와 유사하다.

미합중국도 건국초기에는 연방정부의 힘이 약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서로 견제하면서 성장해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서로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을 때가 남북전쟁이다.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한이 극대화된다. 연방을 탈퇴하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세지가 어디있겠는가.

Webster's_Reply_to_Hayne

Nullification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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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이 강한 연방정부를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된 유럽, 그리고 강력한 유럽 연합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브렉시트 이후, EU는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좀더 강력한 EU를 추구하던지 (강력한 EU는 우선은 UK에 대한 강경대응의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아니면 어떠한 식으로든 민주적인 의사 결정 절차를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사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그리고 엘리트 정치인들과 대중의 괴리이다. 브렉시트 과정에서 영국의 양당은 모두 EU 잔류를 내걸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엘리트 정치인을 불신했다. 사실, 카메룬의 협박(?)은 결론만 보면 틀린말은 아니였다. 그가 말했듯이 Exit을 선택하는 것은 영국민의 선택이지만, 그 와중에서 생기는 사회/정치적인 혼란, 경제적인 부담은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남게되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기성정치에 불만 표시로 브렉시트를 선택하였다.

EU가 태생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은 것 또한 EU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듯이, 엘리트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우려를 표하는 것 또한 나름의 당위성이 있다. 사실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 또한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미국 낙태 이슈 관련 논점들

페북 포스팅에 낙태 이슈에 대해 논점을 정리해달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답을 하다가 길어져서 여기에도 저장해 둡니다.


법, 윤리 이런 쪽으로는 별다른 식견도 없지만 얘기를 꺼낸 죄로 관련 논점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워낙 묵직한 이슈이기에 법, 윤리, 정치 면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미국에 제한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적으로 보자면 이번 판결은 우선 1973년 Roe v. Wade 판결을 확장시켰다는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포스트에서도 설명했지만, Roe v. Wade 판결로 인해 미국은 낙태가 법적으로 허용이 되었습니다. 이번 판결은 낙태시설 접근성을 제한하는 텍사스 법안을 Roe v. Wade 판결을 근거해서 위헌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태를 선택할 권리에 대한 판결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법적으로 인정되는 권리이고 지금 판결은 이를 더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판결을 내린 거죠. (피치못할 사정이 아니고서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는 한국과는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이번주 판결문 전문

Roe v. Wade case는 1973년에 있었습니다. 판결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 사생활의 권리 (수정헌법 14조)를 기본권으로 보고서 potential life에 대한 권리를 기각했습니다. 다만 그 한계를 임신 6개월로 한정지었습니다. 7개월부터는 미국도 낙태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기준에 따르자면 임신 말기 부터 태아가 생명으로서 권리를 인정 받는 셈입니다.

Roe v. Wade 판결문

윤리적으로 보면 이 주제에 대해 개개인이 느끼는 윤리 감정이 다르기에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적인 판단이 항상 윤리적인 판단과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트에도 적었듯이, 태아를 생명으로 보고 있고 어떤 경우에도 낙태는 옳지 않다고 보지만, 다른이에게 동일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아마 이에 대한 논란은 윤리가 상대적인 것인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정말 도덕/윤리라는게 실재하는가? 에 대한 논란이 되기 때문에 토론으로 쉽게 결론이 날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미국 정치에 대한 영향부분으로 돌아와서, Roe v. Wade 이후 낙태는 미국 정치에서 항상 중요한 이슈가 되어 왔습니다. Pro-life 측에서는 Row v. Wade 판결을 뒤집고자 정치적으로 무척이나 노력해왔습니다. 낙태 이슈는 정치인의 진보/보수 여부를 결정짓는 리트머스 시험지이기도 합니다.

지난번 포스트에서도 적었듯이, 미국 대법원이 가진 위상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대법원 판사를 선임할 권한이 주어지는 대통령이 보수냐 진보냐가 중요해 집니다. 어제 판결은 미국 정치 지형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집니다. 대법원 판사가 한자리 공석이 된 현시점에서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판결이기도 합니다.

아참, 낙태 이야기는 사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거나 여성문제, 또는 빈곤의 문제, 미혼모 문제, 성에 대한 이야기 등등 집고 넘어가자면 많은 이슈들이 있는데…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라 법/윤리/정치에 한정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관련 포스트

미국 대법원, 텍사스주 낙태 제한법 위헌 판정

낙태와 의료 접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