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1편 :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들어가며

오늘은 성경 이야기.

전에도 언급했지만, 내가 포스팅하는 목적은 지나가는 생각을 활자에 붙잡아두고 정리하기 위함이다. 이 글도 그런 이유로 썼다.

(내 생각엔) 비교적 객관적으로 성경을 기술 했으나, 기독교에 앨러지 반응이 있는 분들이 굳이 참아가며 읽을 필요는 없다. (재미없고 길어서 읽을 것 같지 않지만.)

시편을 시로 읽기

시편은 성경의 다른 책과는 달리 시로 쓰여졌다.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시적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번역시가 으레 그러하듯 원어의 형식미는 옮기기가 어렵다. 그래서 시편을 읽으면서 이게 원래 시라는 것을 떠올리지 못할 때가 많다.

시편 121편은 꽤 유명하다.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한번도 121편을 시로 읽어본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라면 당연히 있어야할 음율, 절제된 형식, 응축된 사고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가 읽어본 중에는 NIV 버전 번역이 시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NIV 번역 전문을 옮긴다.

A song of asc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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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lift up my eyes to the mountains—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My help comes from the Lord,
the Maker of heaven and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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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ill not let your foot slip—
he who watches over you will not slumber;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will neither slumber nor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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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atches over you—
the Lord is your shade at your right hand;
the sun will not harm you by day,
nor the moon b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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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will keep you from all harm—
he will watch over your life;
the Lord will watch over your coming and going
both now and forever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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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옮기고 보면 121편이 4연으로 된 시라는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일정한 형식 또한 갖추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각 연의 1행과 2행이 한쌍이고, 3행과 4행이 또다른 한쌍이다. 한 연에서 1,2행과 3,4행은 대조의 관계일 때도 있고 (1연 같은 경우), 보충해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4연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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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된 시의 양식은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준다. 잘은 모르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읽는 다면 읽는 맛이 더욱 강하리라 추측한다. 시편은 원래 낭독을 위한 글이고 선율이 붙은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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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시를 분석해 본 사람이라면 같은 방식으로 시편의 시들을 분석해도 재미있다. 121편에는 대조적 심상,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서로 대구하는 구절, 반복되는 이미지 같은 분석거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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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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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에는 시편 121편의 제목이 ‘a song of ascents’으로 되어 있다. 한글로는 ‘올라가는 노래(?)’ 쯤 될 것 같다. (한글) 새번역에는 좀더 친절하게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KJV나 다른 번역본을 보아도 성전과 순례자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새번역이 좀더 친절하게 의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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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로 치자면 추석, 설날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대신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이 있다. 어떤 면에서 무슬림이 메카를 순례하는 일과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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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즉 예루살렘을 걸어서 올라가는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 시를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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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시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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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저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산을 본다. 한글로는 단수인 산이지만 영어로는 복수인 mountains이다.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면 동쪽에 감람산(Olive Mountain), 서쪽에는 시온산 (Zion Mountain)이 있다. 성 자체도 모리아 산(Moriah Mountain) 위에 위치한다.  예루살렘은 산으로 둘러쌓인 천혜의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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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s
(이미지 출처: http://www.returntogod.com/jerusalem/mountains.htm)
1)감람산, 2)모리아산, 3)시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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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 때문일까? 예루살렘 언덕길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요새를 보면서 웅장한 느낌을 받는 것 같다. 비슷한 소재의 노래가 또 있다. 시편 125편이다. 125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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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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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래는 순례자가 산을 올려다 보는 지점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그 이후는 다르다. 125편은 산에서 하나님을 연상하여 그 속성을 찬양한다. 반면에 121편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산을 창조한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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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125편에서는 (산의 속성)=(하나님의 속성)이고, 121편에서는 (산)<(하나님)이다. 121편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은 우주적인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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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1편과 감정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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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문학은 화자의 경험(또는 상상)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것을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능동적으로 연결지을 때에 문학이 힘을 가진다. 이 과정을 다른 말로 하면 감정이입이다. 121편에서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후크(hook)는 1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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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시편 121편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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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의 일차 독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산들과 예루살렘 요새를 보면서 안정감을 느낀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현대의 독자가 시를 읽는다면 산 대신에 나를 둘러싼 보호막을 떠올리는 것이 시를 읽는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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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인간과 불확실성의 문제를 블로그에 쓴 적이 있었다. 불확실성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가장 세속적이면서 현대적인 방법은 물질적인 해법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것은 합리적인 해법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예측이 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 하며 대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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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자면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일 끼니를 챙겨 먹는다. 교통사고를 피하고자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산다. 추위를 막기 위해 옷을 입고,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짓는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해 열심히 수능을 준비한다. 인간은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불확실성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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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70AD -- a painting by David Roberts (1796-1849).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in 70AD —
a painting by David Roberts (1796-1849).

(image source: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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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요새는 AD 70년에 로마 티투스장군에게 함락된다. 결사 항전을 선택했던 유대인은 대다수 굶어 죽었고 그들이 의지하던 요새는 완전히 무너진다.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270만의 예루살렘 사람중에서 110만명이 죽고,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하니, 초토화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책이름은 The War of the Jews이고 영역본은 전문이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다. (링크) 이후 티투스는 개선 장군이 되고, 칠년 후에 황제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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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 당시 고대인의 숫자 개념은 조금 달랐다는 것은 감안해서, 270만/110만 이라는 숫자는 조금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참고2. 요세푸스의 책에서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이야기는 Book 5, Book 6에 나온다. 참고3.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8권에 예루살렘 몰락이 기술되어 있다. 로마인 이야기는 널리 읽히는 책이지만, 그녀가 유대/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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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121편을 읽다 보면 창조자인 하나님에게까지 시선이 올라가게 된다. 내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1연에서 였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과 실패의 기록들, 인간적인 보호막이 때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보면 시편의 저자와 동일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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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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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에서 감정이입에 성공한 독자들은 2연, 3연, 4연을 따라가기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후는 창조자이며 우주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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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은 졸지 않는 하나님께서 낙상을 막아준다는 이야기이고,
3연은 그가 그늘이 되어서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에서 지켜준다는 이야기,
4연은 영원의 존재가 언제나 순례자들을 지켜준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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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스라엘의 사막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는 순례자가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위협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우주적인 존재가 그들을 지켜준다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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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이 노래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시가 어떻게 낭독되고 불려졌을 지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2연/3연/4연을 같이 부르면서 감정을 고양시키고 기뻐했을 것이다. 이는 현대의 교회에서 시편으로 만든 찬양을 부르면서 교인들이 같이 기뻐하는 장면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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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그리스도인이라면, 힘들 때 이 시를 읽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과정은 문학이 주는 치유의 효과와 유사하다. 그 위로의 감정은 순례자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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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족 하나 만 더. 나는 읽으면서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서 순례자를 밤의 달빛에서 지켜 주신다는 이야기가 이상했다. 달빛이 무슨 해를 끼친단 말인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달빛을 오래 쐬면 정신병이 온다고 믿었다. 생각해보니, 미치광이라는 뜻의 lunatic이라는 단어는 달(lunar)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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