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깨진 유리창의 오류)

오늘은 쓰다 보니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다. 생각해보니 페친 중에 경제학자와 박사님까지 계신다. 경제학이라곤 교양 수준 밖에 아는 바가 없는데, 몹시 부끄럽다. 그래도 메모 차원에서 포스팅한다.

영화 제5원소

1997년 여름. 영화 제5원소가 개봉했다. 릭베송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영화감독이었고, 밀라 요보비치의 가슴붕대 복장은 97년 여름 최고 이슈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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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브루스 윌리스. 저때만해도 젊었구나.

영화에서 게리 올드만은 매력적인 악역을 연기한다. 극중에 자신이 왜 파괴, 즉범죄를 일으키는가에 대해 궤변을 늘어 놓는 장면이 있다.

한글 자막 버전 영상을 못구했다. 영문 자막을 올리고 내가 간단하게 번역해 봤다.

Oh, Father, you’re so wrong. Let me explain. Life, which you so nobly serve, comes from destruction, disorder and chaos. Take this empty glass. Here it is, peaceful, serene and boring. But if it is destroyed… Look at all these little things. So busy now. Notice how each one is useful. What a lovely ballet ensues, so full of form and color. Now, think about all those people that created them. Technicians, engineers, hundreds of people who’ll be able to feed their children tonight so those children can grow up big and strong and have little teeny weeny children of their own, and so on and so forth. Thus, adding to the great chain… of life. You see, Father, by creating a little destruction, I’m actually encouraging life. In reality, you and I are in the same business. Cheers.

(내맘대로 번역)

신부님. 오해가 있으십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죠. 당신은 생명을 섬기지요. 그런데 당신이 섬기는 그 생명이라는 것은 파괴와 혼돈에서 생겨납니다. 여기 빈 유리잔을 볼까요? 평온하고, 고요하면서, 지겹지요. 그런데 만약에 이게 깨어진다면… [유리잔을 깨뜨리고, 로봇들이 청소를 한다.] 오  ~ 이 작은 로봇들을 보시지요. 바쁘게 움직이죠. 그럼, 요 이쁜 것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생각해 볼까요? 기술자와 엔지니어들… 오늘밤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아이들을 먹이겠죠. 그래서 그 아이들은 자라고 건강해지고, 또 요만한 새끼들을 낳겠죠. 걔들은 또 아이를 낳고 낳고 또 낳고… 그래서 생명이 계속되어 가는 겁니다. 신부님. 제가 아주 작은 파괴를 했는데, 그로인해 생명이 계속되어 갑니다. 사실은 신부님과 저는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건배.

(잡설: 차승원은 한동안 한국의 게리 올드먼이라고 불리웠는데, 대사를 번역해보니 차승원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 (Broken window fallacy)

어이가 없다. 그런데 게리 올드만의 궤변은 릭베송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다.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로 간다. 프랑스의 사상가 프레드릭 바스티아(1801-1850)가 그의 에세이 ‘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책의 한 챕터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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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 한 아이가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이 깨진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유리창이 깨진 게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가게의 주인은 그로 인해서 유리창을 새로 사게 될 것이고, 유리 장사는 돈을 벌게된다. 그리고 유리 가게 주인은 그 돈으로 구두나 옷을 산다. 그러면 그렇게 창출된 부를 통해 마을 경제는 이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게 타당한 이야기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가게 주인은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면 유리를 사는 대신에 구두나 옷을 샀을 것이다. 그 마을 전체를 본다면 유리창이 부서졌을 뿐이다. 유리가게 아저씨만 돈을 벌었다. 바스티아는 이러한 오류를 지적하면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담 1: 깨진 유리창의 오류 적용

바스티아는 19세기의 자유주의자 중에 하나이다. 오스트리아 학파에 영향을 끼친 사람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자유주의 자체에는 가끔 공감할 때가 있지만, 자유주의자를 인용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지 깨진 유리창 오류를 예로 들어 보자.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정책의 긍정적인 부분만 집중하고 홍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손실을 무시하게 되면 사회는 이 비용을 결국 떠앉게 된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의 핵심은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스티아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상대방이 보지 못한다며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사안에서 진보적인 면만 보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면만을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편향된 것을 보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를 예를 들어 상대방을 비판 하는 일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너의 무지를 알라’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지만…)를 들어서 상대가 무지하다고 공격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게 얼마나 넌센스인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여담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어떠한 면에서 상극이다. 바스티아와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의 설전은 나름 유명한데, 프루동은 바스티아의 사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나보다. 문자 그대로 이성을 잃고 그를 비판한다. 프루동이 적은 바스티아에 대한 평을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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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로동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Your intelligence is asleep, or rather it has never been awake…You are a man for whom logic does not exist…You do not hear anything, you do not understand anything…Your are without philosophy, without science, without humanity…Your ability to reason, like your ability to pay attention and make comparisons is zero…Scientifically, Mr. Bastiat, you are a dea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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