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깨진 유리창의 오류)

오늘은 쓰다 보니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다. 생각해보니 페친 중에 경제학자와 박사님까지 계신다. 경제학이라곤 교양 수준 밖에 아는 바가 없는데, 몹시 부끄럽다. 그래도 메모 차원에서 포스팅한다.

영화 제5원소

1997년 여름. 영화 제5원소가 개봉했다. 릭베송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영화감독이었고, 밀라 요보비치의 가슴붕대 복장은 97년 여름 최고 이슈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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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브루스 윌리스. 저때만해도 젊었구나.

영화에서 게리 올드만은 매력적인 악역을 연기한다. 극중에 자신이 왜 파괴, 즉범죄를 일으키는가에 대해 궤변을 늘어 놓는 장면이 있다.

한글 자막 버전 영상을 못구했다. 영문 자막을 올리고 내가 간단하게 번역해 봤다.

Oh, Father, you’re so wrong. Let me explain. Life, which you so nobly serve, comes from destruction, disorder and chaos. Take this empty glass. Here it is, peaceful, serene and boring. But if it is destroyed… Look at all these little things. So busy now. Notice how each one is useful. What a lovely ballet ensues, so full of form and color. Now, think about all those people that created them. Technicians, engineers, hundreds of people who’ll be able to feed their children tonight so those children can grow up big and strong and have little teeny weeny children of their own, and so on and so forth. Thus, adding to the great chain… of life. You see, Father, by creating a little destruction, I’m actually encouraging life. In reality, you and I are in the same business. Cheers.

(내맘대로 번역)

신부님. 오해가 있으십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죠. 당신은 생명을 섬기지요. 그런데 당신이 섬기는 그 생명이라는 것은 파괴와 혼돈에서 생겨납니다. 여기 빈 유리잔을 볼까요? 평온하고, 고요하면서, 지겹지요. 그런데 만약에 이게 깨어진다면… [유리잔을 깨뜨리고, 로봇들이 청소를 한다.] 오  ~ 이 작은 로봇들을 보시지요. 바쁘게 움직이죠. 그럼, 요 이쁜 것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생각해 볼까요? 기술자와 엔지니어들… 오늘밤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아이들을 먹이겠죠. 그래서 그 아이들은 자라고 건강해지고, 또 요만한 새끼들을 낳겠죠. 걔들은 또 아이를 낳고 낳고 또 낳고… 그래서 생명이 계속되어 가는 겁니다. 신부님. 제가 아주 작은 파괴를 했는데, 그로인해 생명이 계속되어 갑니다. 사실은 신부님과 저는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건배.

(잡설: 차승원은 한동안 한국의 게리 올드먼이라고 불리웠는데, 대사를 번역해보니 차승원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 (Broken window fallacy)

어이가 없다. 그런데 게리 올드만의 궤변은 릭베송의 순수한 창작이 아니다.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로 간다. 프랑스의 사상가 프레드릭 바스티아(1801-1850)가 그의 에세이 ‘what is seen and what is not seen (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책의 한 챕터에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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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 한 아이가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이 깨진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유리창이 깨진 게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가게의 주인은 그로 인해서 유리창을 새로 사게 될 것이고, 유리 장사는 돈을 벌게된다. 그리고 유리 가게 주인은 그 돈으로 구두나 옷을 산다. 그러면 그렇게 창출된 부를 통해 마을 경제는 이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게 타당한 이야기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그 가게 주인은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면 유리를 사는 대신에 구두나 옷을 샀을 것이다. 그 마을 전체를 본다면 유리창이 부서졌을 뿐이다. 유리가게 아저씨만 돈을 벌었다. 바스티아는 이러한 오류를 지적하면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담 1: 깨진 유리창의 오류 적용

바스티아는 19세기의 자유주의자 중에 하나이다. 오스트리아 학파에 영향을 끼친 사람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자유주의 자체에는 가끔 공감할 때가 있지만, 자유주의자를 인용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지 깨진 유리창 오류를 예로 들어 보자.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정책의 긍정적인 부분만 집중하고 홍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일어나는 손실을 무시하게 되면 사회는 이 비용을 결국 떠앉게 된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의 핵심은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스티아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상대방이 보지 못한다며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사안에서 진보적인 면만 보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면만을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편향된 것을 보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를 예를 들어 상대방을 비판 하는 일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너의 무지를 알라’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은 아니지만…)를 들어서 상대가 무지하다고 공격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게 얼마나 넌센스인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여담2: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어떠한 면에서 상극이다. 바스티아와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의 설전은 나름 유명한데, 프루동은 바스티아의 사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나보다. 문자 그대로 이성을 잃고 그를 비판한다. 프루동이 적은 바스티아에 대한 평을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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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프로동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Your intelligence is asleep, or rather it has never been awake…You are a man for whom logic does not exist…You do not hear anything, you do not understand anything…Your are without philosophy, without science, without humanity…Your ability to reason, like your ability to pay attention and make comparisons is zero…Scientifically, Mr. Bastiat, you are a dea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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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와 학력간 상관관계 데이타

2008년 이코노미스트 자료.

이민자의 학력과 자국민의 학력을 비교해서 도표로 나타내었다. 대체로 경기가 안좋은 나라(eg. 그리스, 스페인 등)가 외국인 학력 인플레가 심하다. 반면, 미국은 비교적 낮은데, 학력이 중요하지 않은 저숙련 직업의 이민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미국 사는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 흥미로워서 스크랩.

원문 기사 링크: The brain drain (economist 2008년 2월 28일자)

AT&T의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

작년 10월. AT&T(미국 2위의 통신사, 우리나라로 치면 KT)의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에 FTC(미연방 통상 위원회)가 제동을 걸었다. 과장광고 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AT&T가 일정 용량을 쓰고 나면 데이터 전송속도를 느리게 했다고 한다. 당시 FTC 의장의 트윗이 재미 있어서 리트윗했던 기억이 있다.

며칠전 FCC(미연방 통신위원회)가 결국 1억달러의 벌금을 매겼다는 뉴스를 봤다. (우리돈으로 무려 1000억원이다. 후덜덜)

개인적으로는 ‘세다.’ ‘화끈하다.’는 느낌을 일단 받았다. 기업인의 범죄에 대해 미국은 상당히 강하게 대처한다. 우리나라처럼 벌금내고 말지… 라는 식의 안일함이 잘 통하지 않는다.

기업뿐만 아니라 전 분야가 그러해서, 표절/컨닝/법규위반 등에 거의 심할 정도로 애누리가 없다. 가끔 이들이 준법정신이 강한 이유가 그래서 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공권력도 강하고, 국방비, 치안 유지비도 상당한 비중의 예산을 쏟아 붓는다. 대신 법만 지키면 무얼해도 관심도 없고 참견도 안한다.

우리나라랑은 나라가 작동하는 원리가 다르고, 유럽과 비교해도 사뭇 다르다. 자유라는 것의 대가가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본 일러스트레이션 (Tom Gauld) – Some advice on how to cope in these tough times 등

Tom Gauld라는 일러스트레이터다. the guardian에 카툰 연재를 하고, the new yorker의 표지 작업을 몇번했다. 코드가 맞아서 가끔 본다. 몇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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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lickr)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길… 작가의 블로그, Flickr 이미지

강세와 발음 – Atlanta, fantastic, coyote

내가 사는 동네는 미국의 아틀란타다. 그런데 아틀란타에 살면서 한가지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이 ‘아틀란타’를 제대로 발음하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틀란타로 이사온 처음 몇달간, 미국 사람들은 내가 발음하는 ‘아틀란타’를 알아듣지 못했다. 발음기호대로 또박또박 애!틀!란!타!를 외쳐도 아무도 못알아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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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flickr)

내가 사는 도시 이름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은 모양새가 빠져도 너무 빠진다. 그래서 미국인이 발음하는 소리를 유심히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미국인들은 ‘앨~나’ 이렇게 발음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비슷하게 흉내내면서 ‘앨~나’라고 말하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쓰여진 단어대로면 ‘애틀란타’라고 발음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미국인들이 Atlanta를 ‘앨~나’로 발음하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 2음절 강세단어

첫 번째는 강세 때문이다. Atlanta는 2음절에 강세가 있는 단어이다. 강세는 한국어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음절을 강하게 발음한다. 그런데 영어는 그렇지 않다. 단어에 고저/강약/리듬이 있다. 원어민은 발음 뿐만 아니라 강세까지 포함해서 단어를 인식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발음을 하면 원어민은 그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식으로 Atlanta를 끊어서 애!틀!란!타!라고 발음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1음절인 ‘At’을 약하게 발음하고 2음절인 ‘lan’을 강하게 3음절의 ‘ta’는 아주 약하게 발음을 해야한다. 미국사람들은 강세가 없는 음절의 t발음은 거의 생략한다. 그러면 ‘애ㅅ나’가 된다.

강세는 신경쓰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우리 기준으로는 몰라도 알아듣는데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원어민이 ‘앨~나’라고 말하면, 들을 때는 알아들었다고 해도 강세를 신경쓰지 않고 듣기 때문에 말할 때는 ‘애틀란타’라고 하게 된다.

비슷한 단어가 fantastic이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1음절에 강세를 주고서 ‘태스틱’이라고 발음한다. 그런데 강세를 1음절에 두고 말하면 원어민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팬스틱’이라고 2음절에 강제를 두고 말하면 그제야 그들은 알아 듣는다. (내 경험담이다.) 발음을 신경쓰시는 분들은 fantastic의 f를 p와 구분해서 발음하는데 그분들도 강세를 틀릴 때가 많다. 이러면 발음은 굴리는데(?) 강세가 틀리니까 더 이상하게 들린다.

이런 예라면 정말 많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음을 잘 못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coyote인데, 어떤 분이 발음을 굴려가면서 ‘코~요~테’라고 말해서 듣기가 좀 어색했던 적이 있다. 역시나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분은 본인이 혀를 덜 굴려나 싶었는지 한껏 오버해서 ‘코~요~테’를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다시한번 서로 못알아 듣는 민망한 상황이 발생했다. 사실 미국식 발음으로 coyote는 ‘카리’라고 발음해야 한다. 게다가 이 단어는 2음절에 강세가 들어간다.

둘째 이유: 모음이 없는 소리

Atlanta가 발음이 어려운 데에는 중간에 들어간 t 사운드도 한 몫을 한다.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모든 소리에 모음을 붙여서 발음을 한다. 그렇다보니 자음만 있는 소리에도 습관적으로 ‘~으’를 붙여서 발음한다. Atlanta의 경우는 ‘At’와 ‘lan’사이에 모음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At’와 ‘lan’ 사이에 ‘~으’를 넣어서 발음을 하려 한다. ‘앳~나’가 ‘애틀랜타’가 되면 3음절 단어가 아닌 4음절 단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원어민은 더욱 알아듣기 힘들어 한다.

‘~으’를 붙이는 습관이 어디서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일본식 영어에서 온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알파벳을 처음 배울 때도 ‘~으’를 붙이면서 발음하는 것을 배운다. 대표적으로 잘못 발음하게 되는 알파벳이 ‘V’이다. ‘V’는 ‘브이’라고 발음하는 게 아니라 ‘비~’라고 발음하는게 맞다.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메칸더 브이는 메칸더 비가 되야 한다. ‘V’를 신경을 써서 b발음이 아닌 v발음으로 해도 ‘~으’를 붙여서 ‘브이’라고 말하면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경험담이 있다. 체외 수정(시험관 아기)을 뜻하는 IVF(in vitro fertilization)를 발음할 때 ‘아이-브이-에프’라고 발음했는데, 잘 못알아 듣더라. 나는 IVF가 너무 전문용어인가 싶어서 시험관 아기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줬는데, 그제서야 그 친구가 아~ ‘아이--에프’라고 하는 거다.

발음과 강세가 중요한가?

솔직히 발음과 강세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도 글을 쓴적이 있지만 (발음/관사/전치사 이야기)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 구사력이다. 기본적으로 문장구사력이 된다면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다.

또 한국에 살면서 원어민과 대화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원어민이 아니고 영어가 외국어인 사람들 끼리는 발음이 달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도 발음이 미국식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미국식(또는 영국식) 발음을 못하기 때문에 발음이 틀려도 잘 알아듣는다. 외국나가서 일본사람들하고 서로 영어가 잘 통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하는 이유는 영어가 ‘세계어’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는 영어를 사용한다. 이는 국가 간에 무역을 할 때 달러화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러는 미국의 돈이지만 세계 기축통화로의 역할도 한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세계어를 배우는 데에 있다면 발음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는 우리끼리 영어할 때, Atlanta를 ‘애ㅅ나’ coyote를 ‘카리’라고 발음하면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 혹은 누가 알아듣는다고 한들, ‘너무 빠다 발음하신다~.’ 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비웃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최근 한국의 영어교육에 speaking이 강조되는 것도 무시못할 추세이긴하다. 지금의 영어 교육은 내가 영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하고는 많이 달라지긴 했다. 살다보면 쓸데없는 지식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강세 같은 부분도 알아둔다면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올런지 모른다.

관련 포스트

발음/관사/전치사 이야기

두가지 언어 사용이 만드는 번역체 말투들 – 우리집 사례

강세와 발음 – Atlanta, fantastic, coyote

블로그의 인기글과 추천글

200번째 포스팅을 기념하여, 인기글과 추천글을 정리해봤다. 일년간 글이 쌓이면서 꽤 두서가 없어졌다. 이곳을 효율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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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media)

100번째 포스팅 중간결산 때에 누적조회수가 2,500이었는데 지금은 9,000이 조금 넘는다. 약 2.5배 정도 트래픽이 증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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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5일자 기준

아이 교육에 대해 올바로 질문하는 법

글을 쓰다가 자의식 과잉이 될 때가 있다. 오늘 글이 그러한데, 쓰다보니 개똥철학 교육론이 되어버렸다. 나는 교육에 대해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구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글을 적어본다.

질문이 왜 잘못되었는가?

두달 전에 Ivy League와 미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글을 공유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아이비리그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봐야 딱히 해결책이 있는게 아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되, 속물이 되지 않고,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얼버무리며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서 내내 찝찝한 거다. 왜 찝찝한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싶었다. 어떤 경우는 ‘질문에 무엇을 답하는가’보다 ‘어떻게 질문을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인용한 칼럼의 필자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는 Ivy League 시스템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약간은 소심한 뉘앙스로) 주립대와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필자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하기에 어떤식으로든 대안을 제시하긴 했는데, 본인도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성급하게 마무리 지은 모양새다.

그 글을 읽었던 나도 필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아이비리그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아니면 한국의 명문대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내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생각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그 질문은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하면 행복할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 질문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자연스레 Ivy League와 인생의 성공을 놓고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을 하며 글을 읽게 된다.

질문을 제대로 하려면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부모는 자신의 기대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찌보면 명문대에 진학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본질이 아닌 질문이라는 것이다. 명문대에 간 아이가 불행할 수도 있고, 아닌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

누군가는 계속 물을 수 있다. ‘그래도 역시나 명문대에 가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래도 그 누군가가 이 질문을 여전히 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당신은 잘못된 질문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해줄 것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내가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은 ‘어떻게 부모로서 아이에게 대리욕망을 하지 않는가?’ 이다.

아이는 언제나 아이의 삶을 산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아이의 어떤 면은 나와 무서우리 만큼 닮은 동시에, 어떤 면은 정말로 생소한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여섯/일곱살이 되면 그때부터 자의식이라는 게 생기게 되고, 조금씩 부모의 품을 떠난다. 유치원을 가게 되고 친구와 교류가 생긴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집밖에서 배워온 것을 알고 말할 때가 있다. 부모의 눈에는 여전히 아기로만 보이는데,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고 세상의 지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럴 때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구나. 스스로 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내가 어떠한 기대를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지간에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부모는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한정된 인생경험으로 아이에게 가장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것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일 때도 있다.

부모의 역할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인 나이 중간 값은 마흔하나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인생의 반환점에 거의 다다른 샘이다. 짧게 나마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진정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아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잘하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실존주의의 개념을 살짝 변형시켜 빌려오자면, 인간은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존재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처음에 재미도 없고, 흥미를 못붙인다고해서 그것을 평생 즐기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예를 들자면, 음식의 깊은 맛을 알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나물의 씁슬한 맛, 삭힌 음식의 깊은 맛 같은 것들은 훈련을 통해 알게되는 맛이다. 인간의 본성은 쓴맛과 삭힌 맛을 거부하는데, 꾸준히 먹어가며 입맛이 변하게 된다. 공부/책읽기/글쓰기 등등 몇가지 것들도 역시 그러한데,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되기 까지는 훈련되고 익숙해지며,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본인의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부모의 역할은 그 과정에 조금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와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도 가끔 부모님께 이런저런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부모님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제는 부모님도 연세가 들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온전히 따라잡지 못하신다. 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전보다 복잡해져서 설명하는데에만도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편안함은 그분들이 온전히 내편이라는데에서 온다. 내입장에서 생각해주신다.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때로 큰 힘이 된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자식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관한 책들

칼럼을 길게도 비평했다. 내가 못마땅 했던 것은 칼럼이 질문을 던진 방식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실 필자의 논지 자체는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을 전공한 저자의 책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있다. 미국에서도 꽤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은 한국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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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자는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에 대해서도 실랄하게 비판한다고 한다. <타이거 마더>는 저자와 대척점에 있는 스파르타식 아이 교육법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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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추아는 중국계 이민 2세이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데, 스파르타식 자녀 교육법으로 꽤 큰 파장을 불러 왔던 것으로 안다.

시간이 나면 두 책을 다 읽어 보고 싶다. 문제는 읽지 않은 책이 쌓이기만 한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