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를 읽으며

누구하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포스팅을 해왔는데, 열흘 정도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 집에 3주간 손님이 머물렀고, 이번주는 친구가 다쳐서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11월 들어서는 글쓰고, 그림 그리는 창작하는 쪽의 잉여질보다는 책을 읽고, 컴퓨터 게임하고, 영화를 보는 소비쪽의 잉여질에 열을 더 내고 있다. 몇년간 꽤 바쁘고 힘에 부치게 살았는데, 올해는 원없이 잉여질을 하며 산다. 아이도 조금 컸고, 미국에서 삶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회사도 한국 생각하면 몹시 널널한 편…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나란 인간이 게으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야지 잉여질도 좀더 생산적이 될 텐데, 이건 그냥 소모적으로 내가 만든 세상에 침잠해 가는가 싶다.

10대 때는 소설을 꽤 좋아했는데, 한동안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보지 않았다. 살아가는 일은 소설보다 치열하고, 훨씬 더 다양한 관점과 진실을 보여주는데, 굳이 소설에서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문학은 때로 작가의 관점에서 일말의 진리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작가가 묘사하는 배경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그려보고, 사건을 상상해보고, 그리고 인물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일종의 과정을 거쳐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해도 시간 소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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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가장 소모적인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사랑 이야기.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On Chesil Beach이다. 한국에도 체실비치에서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것으로 안다. 굳이 이언 매큐언을 고른 것은 영미 문학권에서 핫한 작가를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눈으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글책을 구해보는 건 돈도 시간도 아까우니 그냥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영어책을 보자는 귀차니즘도 있었고…

그래도 왜 사랑이야기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한참 피가 끓던 나이에 남녀상열지사에 뜨거운 가슴을 품어본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항상 어설펐다. 게다가 30을 넘기고서는 사랑은 별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하고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이제 만나는 여자와 썸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인 것도 있을 정도였다. 썸은 은근한 긴장감을 주고, 긴장감이란 대체로 기분 좋은 류의 긴장감이지만, 그 긴장감은 내가 좋아하는 편안함과는 반대기제이다.

어쨌든, 책얘기로 들어가서… 책에서 첫날밤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다. (몸의 구석구석을 표현하는 명사, 신체접촉에 관련되는 동사를 사전에서 좀 찾아봐야했다.) 육체로 시작되는 감정의 파장. 그리고 엇갈리는 말들. 내가 20대 청년 일 때 읽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들이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참 먹먹하게 하고 있다. 이야기는 잔잔하게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몰아친다. 결국 책장을 덮으면 진한 여운이 남는다. 플롯을 쫀쫀하게 짜는 것, 디테일한 묘사에서 작가의 꼼꼼함이 느껴진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atonement도 한번 봐야 겠다.

인터스텔라 / Big Her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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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어려서 영화관에 잘 가지 못하는데, 지난 주는 기회가 되어서 영화를 두개나 보았다. 하나는 인터스텔라. 다른 하나는 Big Hero 6이다.

Big Hero 6는 아직 한국에 개봉하지 않은 디즈니 애니매이션이다. 찾아보니 내년 1월달에 개봉한다고 하더라. 마블/디즈니/픽사 라인이고, 미국에서는 개봉하자마자 인터스텔라를 밀어내는 괴력을 보였다.

하긴 인터스텔라가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그다지 흥행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다. (듣기로는 손익분기점 간신히 맞출 정도라나?) 미국사람들이 심각한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인것 같기도 하구… ‘놀런’ 감독 말처럼 우리나라 관객의 지적수준이 높아서 일 수도… 어쨌든 우리나라에는 ‘놀런’ 브랜드가 확실히 자리잡은 것 같다.

Big Hero 6는 샌프란소쿄(샌프란시스코와 토쿄의 합성어)가 배경이다. 주제는 ‘너드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정도? 영화 곳곳에서 샌프란시스코와 일본의 풍경이 섞여서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만화는 어디선가 보았던 클리쉐들로 범벅되어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흥미로운 요소들을 마구 섞었는데 그게 억지스럽지 않고 재미있게 짜여져있다. 꽤 잘빠진 애니매이션이고 한국사람들도 좋아할만한 요소들이 많아서 내년에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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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 역시 재미있었다. 나는 고딩시절 과학자를 꿈꾸었다. 책으로 보았던 사건의 지평선, 웜홀, 블랙홀 같은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데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과학 너드가 아니었던 아내도 3시간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놀란이 만들어 내는 스토리텔링의 힘에서 나왔던 것 같다.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운 가족애와 사랑 이야기를 절묘하게 섟어서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더라.

인터스텔라를 이야기하면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이야기 안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전체에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한 오마주가 가득차있다. 어찌보면 신선함은 없는 영화이다. 영화적인 아이디어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서사 방식 역시 닮아 있었다. (기승전결이 아님.) 다른 점은 큐브릭의 영화는 불친절했고 (대사가 거의 없어서 대부분 졸기 쉽상이다.), 놀란은 다양한 기교를 쏟아부어서 이야기에 몰입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음악/음향효과/편집/CG/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이야기까지 모두 영화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나저나 Big Hero 6는 우리 딸과 같이 보았는데, 후회중이다. 딸아이는 영화에서 나온 마스크 쓴 악당이 꿈에 나온다며 삼일 동안 잠을 설치고 있다. 절대 무섭거나 아이들이 보기 힘든 영화가 아니다. 그냥 우리 딸이 좀 심하게 예민한 편이다. 새벽에 잠을 설친 딸을 달래느라 나까지 잠을 설친다.

기사도와 여인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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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Medieval Times라는 디너쇼를 보았다. 중세시대 기사들의 마상시합 토너먼트를 재현하는 쇼이다. 음식도 기대보다 괜찮았고, 서커스를 방불케하는 마상묘기와 칼싸움 재현이 볼만했다. 아이들도 좋아했고 나도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토너먼트에는 여섯명의 기사가 등장한다. 극장에 입장할 때 각기 응원할 기사를 알려주고 자리를 정해준다. 우리 일행은 Black & White Knight 을 응원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토너먼트가 시작하기 전, 식사와 잠깐의 여흥이 제공되었다. 식사가 마무리 되고 분위기가 정돈될 무렵, 드디어 우리의 기사님이 등장한다.

이탈리아계인 우리의 기사. 투구를 벗자 갈색 곱슬머리가 턱까지 흘러 내린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과 건장한 젊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가 보는이를 흥겹게 한다. 그는 관객을 향해 윙크를 살짝 날려주신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우리 진영을 지날 때면 창을 높이 올려 호응을 유도한다.

무릇 기사라면 아리따운 공주와 그녀의 응원을 빼놓을 수 없는 법. 우리의 Black and White Knight은 카네이션을 자기의 여인내들에게 던져준다. 그의 승리를 응원하던 여섯살 우리 딸. 기사가 던진 꽃이 날라와 이마에 맞자 진심으로 감격한다. 그 순간부터 꽃은 아이의 소중한 보물이 된다. 꽃을 작은 두손으로 꼭 쥐고 승리를 응원한다.

고등학교 시절 운동회가 생각 났다. 나는 남녀공학을 다녔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하는 10대 후반. 운동회는 남자들에게 수컷다움을 한껏 뽐낼 수 있는 장이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계주. 달리기 좀 한다 싶은 친구들은 계주에서 육체적인 능력을 한껏 과시한다. 여자반을 지나칠 때 시크한 표정을 지어주며 호응을 유도하는 몇몇 수컷들. 여자아이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수컷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며 축제를 만끽한다.

나는 운동에 별 소질이 없는 nerd과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종류의 축제는 항상 어색하다. 축제의 현장에서 조금은 쿨한척 한발짝 떨어져 있는게 주로 나의 전략이다. 우수한 수컷들 사이에서 들러리로 서는 것은 100%로 지는 게임이다.

그날 나는 딸아이와 함께 그녀의 기사님을 응원했다. 쇼가 시작할 때, 연회를 주관하는 왕과 공주는 기사도(chivalry)를 외쳤다. 쇼를 마치고서 깨달았다. 마상시합토너먼트의 처음이자 끝은 chivalry라는 것을… 나는 다른 관객들과 함께 chivalry를 반복해서 외쳤다. 고등학교 운동회에서도,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서도, 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도 못 느껴본 그것을 그날 느꼈다. 딸아이와 함께 있기에 감정이입이 가능했던 것일까?

공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기사도는 밖에서 지켜볼 때는 웃음의 소재일 뿐이지다. 그러나 그 세계를 안에서 체험하면 피와 땀이 흐르는 진지한 가치가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굳이 밖에 서서 쿨한척 코웃음을 치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숭고함이다.

허무하게도 그날 우리의 Black & White Knight은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바로 탈락했다. 크게 낙담한 우리 딸아이를 달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제 집에 가서 나를 달래기 위해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꺼내야 겠다. 지금은 그 책에 도전해 볼 준비가 된 듯싶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목탄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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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인 친구아들 선물용 스케치.

인물화는 잘그려야 본전인데, 만화는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라. (사실 노력은 인물화가 몇배 더 들어가는데… ㅎㅎ) 만화 스케치는 simple version 인물화 쯤 되는데, 나름의 영역을 구축했기에 무시하기 어려운 장르인듯. 원화의 붉은 색감이 콘테크래용과 잘 어울려서 만족스럽다. 눈이나 세부 디테일은 조금 연습이 필요할 듯 한데, 이쁘게 그리는 거… 비율 맞춰서 그리는 거는 내 특기가 아니라서 동기부여는 약하다. 그냥 이정도 수준으로 만족.

올겨울에는 파스텔화에 도전해볼 생각인데, 콘테 크레용이 연습으로 좋은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