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담 (회사 gym에서 / 영어 프리젠테이션)

첫번째 잡담

회사에서 운영하는 gym이 있는데, 한달에 25불이다. 거의 거저인 샘이다. 게다가 매일아침 커피와 과일이 공짜로 제공되어 커피만 가져다 마셔도 본전은 한다.

공짜 커피가 아주 인기가 있지만, 매일 운동은 안하고 커피만 가져가는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것은 함정. 나두 실은 그 무리들 중에 하나다. 그래두 양심은 있어서 살금살금 가져가는데… 문제는 여기 관리하는 흑형아저씨가 내 얼굴을 안다는 것. 저 멀리서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What’s up!’ 하는데 심히 쪽팔리다. 그래도 내놓은 돈 때문에 꿋꿋하게 가져간다는…

나는야 딸아이한테 잔소리 들으면서 꿋꿋이 운동 안하는 배나온 미국아자씨.

두번째 잡담

누가 그런 말을 했다. 하고 싶은 일 한가지를 하려면 하기 싫은 일 아홉가지를 해야한다구.

나는 먹고 살려고 하기 싫은 거 몇가지를 하고 살아야한다. 하나는 영어고 하나는 프리젠테이션. 최악의 콤비는 영어 프리젠테이션.

학교 다닐 때, 미국애들 앞에서 발표하는게 싫어서 발표있는 수업은 피해다녔는데 지금은 마케팅부서에서 말로 먹고 산다. 이번주 프리젠테이션이 있는데, 보스한테서 constructive feedback 작렬. 미국인 답지않은 솔직한 피드백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아주 쓰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게으른 종자라는 것을 아시고 항상 발가벗겨서 정신 바짝 차리게 하시는 듯.

영어랑 프리젠테이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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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top 10 influential books

페친께서 저에게 영향을 끼친 10개의 책 릴레이의 바톤을 넘겨주셨네요.

딱히 독서 세계가 넓지도 않지만, 책이야기 하는 것 만큼은 좋아하기에 영향을 끼친 10개의 책을 선정해 봤습니다. 대단한 깊이가 있는 책도 아니고 그저 동시대를 살았으면 한번쯤 들어봤을 책들입니다. 포스팅 하면서 책에 얽힌 옛날의 추억들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쓰다보니 늘어나서 10개의 책이라기 보다는 10개의 뭉터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이야기를 좋아하다보니 기억에 남는 책은 거의 소설이네요. 비소설도 분명히 꽤 읽었는데 말이죠.

참고로 이건 책추천도 아니고 불량식품 같은 책도 끼어있는 목록입니다. 그냥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 이야기 정도랄까요? 주로는 유년기/청소년기에 읽은 책들입니다. 아무래도 자아 형성은 그 시기에 되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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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웅진 세계 전래 동화 시리즈 (일본 전래동화, 아코마 인디언, 호피 인디언 전래동화 등등)

유치원 시절, 어머니가 잠시 책 외판일을 하셔서 우리집에는 세계 전래 동화 시리즈 전집이 있었다. 집에서 딩굴거리며 책읽기만 좋아했던 나는 어렸을 때 인디언 전래동화의 환상적인 세계와 일본 전래동화의 기묘한 이야기 같은 것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이 주된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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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내 또래의 중고딩들이 그렇듯이 나는 추리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사촌형 집에 홈즈(아서 코난도일) / 뤼팡 (모리스 르블랑) 전집이 있었는데 거기 놀러가서 하나씩 빌려서 읽는게 삶의 낙이 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서늘한 공포는 나를 한동안 사로잡았다. 수십번은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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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임머신 (H. G. 웰스)

내가 탐닉했던 장르 중에 하나는 SF다. 고딩 때 한동안은 매일 서점에 들러 SF 코너에서 신간 리스트를 보던게 주된 낙이었다. 필립 K 딕 단편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두번째변종 등)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도 인상 깊었지만 아무래도 좀더 고전적인 <타임머신>이 나를 오랜 기간 사로잡았었다. 최근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읽어 보았는데, 자본주의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징이 닮긴 수작이었다. 만화까지 포함하자면 고3 때 ‘총몽’에 빠져서 사이버 펑크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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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쥬라기 공원 (마이클 클라이튼)

두 책을 함께 묶은 이유는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들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철저히 개미의 관점에서 그려진 세계이다. 그것은 3차원이 아닌 2차원/1차원의 세계이다. 인간이 인지 할 수 있는 세계가 3차원이라면 그 이상의 차원은 우리가 인지하는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에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이해할 수 없다. 과학과 현대 문명에 한계가 있음을 얄팍하게 나마 느꼈다.

<쥬라기 공원>은 영화 덕분에 액션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소설이 소개하는 카오스 이론에 꽂혔었다. Chapter 마다 묘한 그림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예상치 못한 큰그림을 보여 주었던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복잡계에 대한 개념을 접했었다. 속편에서는 퍼지 이론에 대해서 소개했는데 그것은 1편보다 신선함이 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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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고등학교 시절 영웅 이야기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도 그 중에 하나 였다. 그리스의 영웅들 (플루타크 영웅전), 삼국시대 중국의 영웅들 (삼국지), 무협세계의 영웅들 (김용의 사조 삼부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도 모두 나의 영웅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은영전의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를 뛰어 넘지는 못할 것 같다. 지금 읽으라고 하면 다분히 중2병스러운 인물 묘사를 견디지 못할 듯 싶지만, 그당시 나에게 너무나도 멋있던 그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아니지만 같은 맥락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도 재미있게 보았다. (역사라기 보다는 소설로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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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주 열국지 (민음사 판)

이문열 역 민음사 삼국지 10권을 세번 정도 읽고서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서유기와 열국지였다. 열국지는 당시 10권으로 민음사에서 나왔는데 12권으로 최근 다시 증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야기는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 백가 이야기. 전국의 군웅들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약 800년간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 초한지까지 읽었었다. 한번 빠지면 디비 파는 내 성향으로 맹자와 장자까지 손을 뻗쳤긴 했다. 물론 고딩인 내가 내용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장자의 기묘한 이야기는 그래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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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계사 편력 (네루)

소설을 말고 내가 좋아했던 건 역사였다. 역사 또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지 모르겠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은 나에게 균형잡힌 역사관을 심어준 책. 영웅 중심의 역사에 심취해 있던 나에게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는 한국 근대사를 다룬 <우리역사 최전선> (허동현, 박노자)를 재미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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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

너무나도 매력적인 이책을 만난건 도서 대여점이었다. 방학때 시간 때우기로 빌린 이 책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아서 이틀동안 밥도 먹는둥 마는둥하면서 책만 읽었다. 책 곳곳에 가득한 기호학/신학/중세의 모습이란… 그러한 풍부한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단숨에 읽게 만든 저자의 재능/노력은 나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지금도 표지를 보면 설레는 그런 책. 여담으로 당시 묘사했던 중세의 도서관의 모습을 스위스 장트갈렌의 고성당에서 발견해서 너무나도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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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장미의 이름이 소설적인 재미로 나를 흥분하게 했다면 신앙적으로 나를 흥분하게 만든 책은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차분하게 논리 정연하게 서술한 이 책은 나의 신앙의 큰 기둥이 된 책이었다. 대학 시절 나의 주된 독서의 영역은 신앙에 관한 책이 었는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간증이나 사례집도 많이 읽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좀더 단단한 근본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생각나는 책들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복음의 핵심’,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힌 영성’, IVP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학생운동’ 이다. 한때 로이드 존스에 심취해 있었는데, 런던에 갔을 때 흠모하는 마음으로 웨스트 민스터 채플에 방문해서 주일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교회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흠모한다고 하니 교인분께서 설교가 타이핑되어 있는 당시의 주보를 원본으로 몇부 주셨고, 책을 한권 주셨는데 그 때 받았던 책이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다. 복음주의 운동을 잘 정리한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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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창세기 (구약 성경)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창세기 이다. 항상 성경 통독을 시작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책이라서 가장 익숙하지만, 사실은 이야기 이기 때문에 나에게 항상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굳이 두번째를 꼽는다면 바울의 ‘빌립보서’ 바울의 케노시스의 신학이 잘 나타나 있고, 통달한 도인 같은 자기 비움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나와 있는 책이다. 빌립보서는 참으로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책이다.

* 그외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면 어찌 이것 뿐이겠는가. 10개로 압축해서 이렇게 써봤는데, 그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나열해 보고자 한다.

키노 (영화잡지), 몬스터(만화) (우라사와 나오키),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대지 (펄벅), 톨스토이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등),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 순전한 기독교(C S 루이스),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괴짜 경제학 (스티븐 레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리차드 파인만), 학문의 즐거움(히로나카 헤이스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로버트 피어시그)

먼 후일 /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개벽>(1922.8) 수록

+ 덧

너무나도 그리워서 잊고, 믿을 수 없어서 잊는 소월의 당신은 누구/무엇이었을까. 시대가 10대 후반의 시인을 이렇게 청승맞게 만들었을까.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이렇게 절절하게 표현해 내는 시가 또 있을까 싶다.

오늘의 세가지 단상 (iOS8 / red wine vinegar / 궁극의 놀이감)

첫번째

iOS 8이 iPhone 4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이제 6 plus로 갈아타야 하나 고민중이다. 아직 멀쩡한 폰인데, 이미 페북을 구동하는 일은 버거워 진지 오래이다. 이제 앱들은 점점 iOS 8에 최적화 될텐데, 딸리는 하드웨어 때문에 더욱 힘들어할 내 폰을 생각하면 꿀꿀해진다.

기술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돈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내가 필요해서 생긴 소비가 아니고 끌려가는 소비가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둘째

레드와인 비네거. 두번 연속 맛보았는데 괜찮다는 것은 먹을만 하다는 뜻. 어제는 소심하게 찔끔. 오늘은 조금 대범하게 퍽퍽.

얼마간 점심은 스피니치, 블랙빈, 병아리콩, 오이채, 양송이버섯, 그리고 피망을 듬뿍 담은 접시에 올리브유와 레드와인 비네거를 팍팍 뿌린 샐러드가 될 듯 하다.

3불 짜리 샐러드는 내가 누리는 근사한 사치.

셋째

원래 천성이 게으른 인간인데, 블로그질/그림질 같은 궁극의 놀이감까지 손에 쥐었으니 큰일이다. 하는 일이라곤 빈둥거리면서 그림이나 그리고 정신세계나 논하면서 밤을 지새우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내게 가장 생산적이었던 시간은 당장 일주일 뒤 캄캄한 앞날과 불확실함이 주는 두려움을, 스물스물 올라오는 생계의 걱정을, 그저 숙명으로 생각하고 뭐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여유도 좋지만 밥값은 하고 살자. 블로깅도 끊어야 하는 걸까?

딸아이의 눈물

+ 주의: 오늘 글은 제가 기억에 남기고자 썼지만, 100% 저의 입장에서 씌여진 글이기에 미화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은 아이와 놀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아버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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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려고 하는데 아이 엄마가 모른척 넘어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왜?’라는 질문이 머리속을 맴돌지만, 지금 누가 답해줄리 없다.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면서 차근차근 달래는 것. 아내를 마트에 보내고 내가 아는 방법을 시도해본다. 첫번째 시도. ‘엄마 없는 데 뭐 맛난거 먹으러 갈까? 빵집 어때?’ 고개를 절래 흔든다. 실패. 배가 고프지 않거나 사먹으러 갈 기운이 없나 부다. 두번째 시도. ‘좋아하는 노래 틀어줄까?’ 아이는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낸다. ‘으~음’ 노래도 듣기 싫은가부다. 세번째 시도. ‘그럼 아빠가 옛날 얘기 해줄까?’ 그제야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옛날 이야기래봐야 별거 없는데 즉석에서 만들어 허접한 이야기 들려주니 귀를 기울인다. 마음이 풀어졌는지 조금 있다가는 원숭이 소리 들려준다면서 끽끽거리며 장난을 걸어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보니 아이 엄마가 오고 아이의 마음은 완전히 풀어져있다.

딸아이는 눈물이 많다. 처음에는 떼쓰는 아이로 키우기 싫었기에 아이의 울음에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온종일 에너지를 쏟아낸 날은 저녁 즈음이 되면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 그럴 때 아이는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짐짓 모른척도 해보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울음의 원인을 묻는다. “너무 마음이 안좋아.” 양치가 하기 싫다고 말했다거나 자러 들어가기 싫다고 말했으면 훈계라도 했으렸만 마음이 안좋다고 한다. 그래 늦게까지 잠을 안재우고 지금에서야 잘 준비를 시키는 부모 탓이다. 아직 여섯살이니 그만한 버틸 힘이 없겠지. 일곱살이 되면 달라지리라. 번쩍 들쳐 앉고서 양치를 하러 간다.

딱히 떼를 쓰는 아이는 아니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어도 몇번 말해보고 안된다 싶으면 거기서 그만이다. 좋아하는 초컬릿이나 캔디가 앞에 있어도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면 두번 묻지 않는다. 아이 답지 않게 절제 못하는 모습이 있으나 나이를 생각했을 때 딱 눈감아 줄 정도 이다. 오히려 절제하지 못하는 건 아비가 더 심하다. 딸은 절제 하지 못하는 아비의 모습을 볼 때 또다른 어미가 되어 한마디씩 던지곤 한다. “자세 바로하고 밥먹어.” “아이패드 그만해.” “운동 좀해.” 다 맞는 말이다.

그나저나 왜 울었을까? 배가 고팠던 걸까? 세상에는 두종류의 아이가 있다. 배가고프면 난리가 나는 아이, 밥을 하루 종일 굶겨도 떠서 입에 넣어 주어야 그제야 먹는 아이. 가은이는 전자에 속하고 나는 어렸을 때 후자에 속하는 아이였다.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지만, 아까 빵집을 제안했을 때 거절했다. 이건 답일 수 없다.

엄마와 다투었거나, 존심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 일까? 가능하다. 이 아이는 눈물이 많은 아이지만 동시에 자존심이 몹시 강한 아이이다. 말을 더듬더듬 하던 돌이 갓지났을 무렵에도 부모가 뭐라하면 입술을 꼭 깨물고 억지로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 엄마는 딸에게 잘못을 시인하는 법을 가르키려고 노력했다. 이제 잘못을 시인할 줄 알지만, 그 안에 가득한 자존심은 여전하다.

아이가 잠들고,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아내에게 무심한 듯 물어본다. “아까 낮에는 왜 그랬던 거야?” “뭐?” “울었던거.” “아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고 뭔데?” “거울을 봤는데, 갑자기 자기 볼하고 눈이 예전하고 다른 것 같다고… 자기가 변해가는 것 같아서 슬퍼졌데.”

그러고 보면 딸아이는 몇달전에 비해서 젖살이 빠져서 볼이 헬쭉해졌으며, 눈이 더 커졌다. 어른에게 나이가 먹음은 주름하나 더 생기고, 활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매일 매일이 다르다. 작년에 아빠의 허리띠가 눈높이였다. 지금은 아이의 눈은 내 배꼽과 같은 높이이다. 매년 달라지는 눈높이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대부분은 그러한 변화를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일 텐데 이 녀석은 아쉬움으로 느낀다.

“여보도 어렸을 때 그랬데?” “뭘?” “감성적인거…” “아 나도 어린 시절생각하면서 운적이 있데.” “여보 닮았구나?” “그치만 저정도는 아니었지 싶어.”

역시나 생소하다. 아이가 감수성이 풍부한 것은 감사할 일이다. 세상이 쉽지 않은데 그러한 감수성을 가지고 사는게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미국의 중산층 그리고 맞벌이 부부의 삶

같은 부서에 일하는 분들 중에 세사람이 최근에 집을 샀다. 미국에서 집을 사면 대부분 모기지 론을 하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모기지는 집값의 20%를 본인 돈으로 지불하고 남은 금액을 20 – 30년에 걸쳐 갚아가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한때 모기지 이자가 3% 이하로 떨어진 적이 있지만 지금은 테이퍼링으로 4%를 넘어가는 상황이다. 애틀란타가 미국의 다른 대도시에 비교해서 집값이 싼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형편이 되는 만큼 지출은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역시나 대부분은 평생을 빚을 갚아가며 살게 된다.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기본적인 지출은 항상 그 규모에 맞춰 정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기지, 자동차 할부, 보험료, 보육비, 식비 등 기본적인 지출을 하고 나면 그다지 남는게 없는 삶을 산다. 대부분 사람들은 저축을 하지 못한다.

미국사람들은 전세계적으로 낭비하고 절약할 줄 모른다는 것으로 악명높다. 일정부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위의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렇게 많이 낭비하거나 흥청망청 쓰고 산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주로 만나는 미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학사나 석사를 마친 회사에 다니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중산층 정도의 사람들이다. 아마 자영업을 하는 분들이나 전문직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른 상황일 수 있을 것 같지만 내가 경험한 기준으로 미국 사람이라고 사는게 그다지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중산층 미국인의 주된 지출은 아무래도 모기지다. 그들이 집을 살 때 고려하는 것은 학군과 안전이다. 학군은 미국에서도 몹시 중요한데, 좋은 학교가 있는 지역은 집값이 비싸다. 또 지역에 따라 범죄율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총기 소유가 합법적인 미국에서 안전한 지역에 사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학군을 생각해서, 안전을 따져서 집을 사다보면 결국 비싼 집을 무리해서 빚을 지고 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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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내 눈에 들어온 책 중에 하나는 “the Two-Income Trap”이라는 책이다. 한국에는 ‘맞벌이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미국의 중산층의 현실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엘리자베스 워렌이라는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출신이다. 파산법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관계로 이 책에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파산의 실례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바는 이렇다. 오늘날 맞벌이 가정은 과거 미국의 single income 가정보다 더 많이 번다. 그러나 그들은 늘어난 신용을 바탕으로 좋은 학군과 안전한 지역의 집을 사게 되었고 이는 집갑의 상승을 가져오고 미국 공교육의 실패와 맞물려서 결과적으로 중산층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맞벌이의 소득에 맞추어 고정지출을 늘였던 많은 중산층들은 실직을 맞게되면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어서 파산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해고가 자유롭고 의료보험의 부담이 큰 미국에서 이러한 위협은 아주 실제적이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시야가 개인의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이 실제적이라는 점에서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는 최근 뜨는 민주당 정치인 중에 하나이다. 최근 힐러리가 주춤하는 사이 그를 대신할 여성 대권주자 중에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정치 신인이었던 그녀는 2008년 미국 신용위기 때 소비자 금융보호 단체(U.S. Consumer Financial Protection Bureau)를 창설했고, 월가에 실날한 비판을 해서 저격수로 이름을 얻었다. 2012년 공화당 지역이었던 펜실베니아 주에 상원의원으로 출마해서 승리해서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말을 직설적으로 논리적으로 잘하는데, 여자라는 점, 그리고 중산층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그 인기가 플러스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성경을 어떻게 믿는가?

* 들어가며: 대부분 저의 포스팅은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오늘 이야기는 개인 기독교 신앙에 관련한 이야기이고 기독교의 전제가 깔려 있므로 기독교에 알레르기를 일으키시는 분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늘 쓰는 글도 역시나 일종의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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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pedia) 사해버전 성경 (Est. 408 BCE to 318 CE)

내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점검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이고 하나는 ‘십자가’이다. ‘성경’은 나의 신앙이 성경의 하나님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성경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부활하신 십자가 사건과 보혈의 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믿음이 다른 종교와 다르게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인식에서 그러하다.

성경을 어떻게 믿느냐는 쉽지 않은 신학적인 문제이다. 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하는 과정은 수월하지 않다. 종국에는 체계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나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이것은 내게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오늘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고 생각을 정리 해보고자 이 글을 적어본다.

첫번째는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저자가 작성한 원문 그대로 인가 하는 문제이다. 가장 최근에 쓰여진 신약 같은 경우도 2000년이 지난 문서이고 구약 같은 경우는 35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고 가장 원본에 가깝다는 사해문서 조차도 몇백년에 걸쳐 베껴 쓰인 책이다. 또한 정경도 몇차례의 공의회 이후에 정립된 것이니 우리가 오늘날 보는 성경은 원본에 얼만큼 가까운지 알기 힘들다.

두번째 이슈는 최근에 생각하게 된,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진리라는 것은 언어에 갖혀있다. 언어에 갖혀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언어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본질과 정확하게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의 사고가 언어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고자체도 언어 속에 갖히기도 한다.

두가지 이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느껴본 적이 있겠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다른 관점과 자아가 생긴다. 물론 분명히 나는 똑같은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영어를 사용할 때와 한국어를 사용할 때의 나는 미묘하게 다르다. 제스쳐도 달라지고 사고를 전개하는 방식도 달라지며, 목소리나 발성법까지 달라진다. 이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차이를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내 관점까지 바꾼다.

이를테면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나는 무의식 중에 상대가 나보다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를 염두에 둔체 말을한다. (이것은 존댓말이 없는 영어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한국어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한계가 있는 도구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헬라어/히브리어로 제한되어 지는 것인가? 또 우리가 읽는 성경의 헬라어/히브리어는 현대의 우리가 이해하는 헬라어/히브리어와 일치하는 것 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제 아이와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일테지만 그것이 다시금 새롭게 다가 왔다. 언젠가 누구에게 들었본적이 있는 이야기 일테지만, 내게 새롭게 느껴졌으니 감사할 일이다.

바로 성령이다. 나는 하나님(성부), 예수님(성자)에 집중하고 성령에 대해서는 무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인 것이다. 성령을 단순히 우리에게 복을 주는 존재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어제 아이와 읽었던 말씀은 베드로 후서 였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1:20-21

참고로 여기서 예언은 앞을 보는 예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서와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을 말한다. 즉 신약 이전에 쓰여진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언어의 불완전함과 인간적인 저자의 관점까지 넘어서는 성령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자면, 필사의 불완전함/정경 체택 과정의 인간적인 부분/그리고 번역의 불완전함을 뛰어 넘어 성령은 역사한다고 믿는다. 성령이 없이는 교회와 신앙이 쌓아올려 질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인용하고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말씀(로고스)’이라고 하고 있다. 성경과 언어에 대한 생각을 한 후에 요한복음을 읽으니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이었다. 그 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을 이기지 못하였다. (새번역 요한복음 1장 1-5절)

+덧붙이며: 제 블로그 방문객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기독교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이 글을 읽으셨다면 논리적으로 비약을 느끼실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논리/과학이 아니며,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믿음으로 뛰어넘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 아닌 성령이 하는 영역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벌레, 그리고 두려움에 대처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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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http://www.bugsvill.co.kr)

예전에는 딸아이가 벌레를 재미있어 했다. 한번은 뉴욕의 장남감 가게에 갔는데 박제된 곤충을 좋아해서 거기서 한참을 보고 있는 거다. 문제는 우리 마눌님은 벌레를 보면 기겁을 한다는 것. 그래서 마눌님 몰래 곤충 박제를 몇개 사줄 계획까지 짠 적이 있다. 그러다가 계획이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러던 녀석이 요새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엄마가 기겁해서 놀라는 걸 보고서 그대로 배운게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대부분 어떤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을 부모를 통해서 배울 때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가끔 아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는데, 대부분 우리가 아는 영역 밖의 것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에게 모르는 것을 관찰하고 배우는 방법(과학의 방법)을 가르키거나, 아니면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종교의 방법)을 가르켰으면 하는데… 내가 가르킨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하다. 스스로 터득하고 깨우치기를 기다려 주는 수 밖에. 그래도 가장 안배웠으면 하는 것은 무지의 영역을 부정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방법이다.

어렸을 적을 생각해보면 벌레 같은 것은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매해 여름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갔었던 게 컸던 것 같다. 서울에서 크고 자랐지만 산골에서 매미를 잡고, 모기에 뜯기면서, 잠자리채 들고 산골짝과 담배밭/고추밭을 뛰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내게 벌레는 미지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그냥 같이 살아가는 생물중에 하나 일 뿐이었다.

반면 나는 초자연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겁이 많은 아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유령 이야기는 정말 소름끼치게 싫어 했는데, 혼자 자는건 꽤 커서도 무서웠던 것 같다. 다행인지 우리 집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아주 어렸을 때는 단칸방에서 네식구가 같이 잤고, 꽤 커서까지 동생이랑 한 방을 썼었다.

커서는 딱히 초자연적인 것에 흥미가 있는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무관심한 편이라 이제는 그리 무서움을 타는 편은 아니다. 다큰 남자 어른이 무서운 이야기에 겁먹어서 쓰겠나…ㅎㅎ  내가 크면서 터득했던 두려움에 대처했던 방식은 두려움의 영역에 대해서 가능한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무의미한 호들갑을 최소화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요새들어서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영역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방법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게 대표적인 무지의 영역은 여자의 마음이다. 학창시절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연애에는 항상 젠병이었다. 결혼을 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고 어찌보면 유령보다 더 무서운 아내의 호통이다. 그것은 머리로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일 대상일 듯하다.

아이가 무지를 또는 두려움을 어찌 대처하는가를 잘 배웠으면 좋겠다. 물론 요즈음은 벌레가 나오면 기겁하고 있는 엄마와 아이를 위해 잡아 죽이고 흔적처리까지 한다만…

딸아이를 위해 그려본 만화 스케치들

여섯살 딸아이를 위해서 만화를 몇장 스케치해 봤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타’를 그려 봤는데, 어린이용 물감을 써서 살색이 없었던 고로 얼굴이 누렇게 뜬게 에러. 마눌님은 귤많이 먹은 황달 소녀 같다고… ㅎㅎ

캡처

 

두번째는 잉크로 가볍게 그려본 스케치.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해 만화는 좀 어렵다….ㅎㅎ

캡처

기계의 얼굴을 한 사람들

요새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대시보드(dashboard) 구축이다. 대시보드는 일종의 표준화된 레포트를 말한다. 어제 잠깐 동료들과 식사를 하면서 아무리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도 왜 대시보드에 에러가 발생할까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첫번째 이유는 자꾸 바뀌는 환경이다. 대부분 시스템/대시보드는 다른 시스템과 연결되어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설계할 때와는 환경이 달라지고 링크들이 깨지게 마련이다. 두번째 이유는 사람이다. 담당자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동일한 담당자라도 바뀌는 환경을 새심하게 신경쓰지 않으면 프로세스가 엉켜서 에러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회사일이라는 게 시간이 흐를 수록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시스템이 복잡해질 수록 일은 점점 분업화되고 서로 책임과 업무의 구간을 명확히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지 점점 파악하기 힘들어 지고, 점점 아무 생각없이 메뉴얼대로 일을 하게 된다. 금전출납 계원은 생각없이 영수증을 시스템에 입력하고, 보고서를 만드는 사람은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에 무감각해지고 그저 정해진 프로세스대로 기계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효율적/과학적/객관적인 시스템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일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면 일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그저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매일 하는 일에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고 일의 의미나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가치나 의미 같은 것은 계량화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뒤로 밀려날 뿐이다.

모던타임즈

(Image Source: 영화 ‘Modern Times’ (1936))

찰리 채플린은 20세기 초에 기계의 부속으로 변해버린 인간의 비극을 그린 영화를 발표했었다. 영화 모던타임즈는 채플린이 사회주의자라고 매도 당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는 자의반/타의반으로 미국에서 추방당한다. 당시 그는 블루칼라의 기계화를 그림으로 그려냈지만, 21세기의 지금에 와서는 화이트 칼라 역시 그저 기계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된 것 같다.

현대 문명이 이루워낸 놀라운 성과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계량화 할 것을 강요한다. 과학의 눈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사물의 가치는 사라진다. 내 어릴적 낙서가 적혀 있던 공책은 과학의 눈으로 볼때 종이와 잉크에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유명인이 되지 않는 한…) 남녀의 사랑과 결혼은 과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와 의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는 생일 조차도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나는 것 조차 의미가 없고, 세포의 분열 활동에 지나지 않는데 우연히 정해진 하루를 매년 축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의 몸은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가치나 의미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기계가 된다. 우리는 세월호의 선장을 통해 그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그는 매일 그가 운전하는 배에 화물을 실은 것과 아이들을 실은 것에 의미의 차이를 부여하지 않는다. 세월호의 담당 관리들도 그러했고 관련한 관료들도 그러했다. 메뉴얼을 그대로 보고 하거나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어떠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나는 다른가? 나 또한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고 사는가? 기계적으로 메뉴얼을 따라 살지 않는가? 나에게 주어진 일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요즈음 읽고 있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인지… 세월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요새 내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일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머리속을 맴도는 질문은 비슷하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같은자리에서 질문을 모양만 바꾸어 가며 하고 있다.

그럴 때 나를 잠깐씩 현실 세계로 끌어 당기는 것은 딸아이와 마눌님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나에게는 해독인 것인가? 이또한 계량화 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다. 오늘 아이하고 더 즐겁게 놀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 덧 (2015년 11월 11일) : 이 글의 주제를 한단어로 요약하면 디지털 테일러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테일러리즘 관련하여서는 최근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