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질문

어제밤 딸아이와 기도하면서 말미에 짧게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언급을 했다.

아이는 나에게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스라엘이 착한편인가?’ ‘왜 서로 죽이는가?’ 아이는 성경의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의 차이에 혼란스러워 하는 듯 했다. 나도 혼란스럽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어린아이와 질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야기를 해서인지 아이는 무섭다고 30분 정도 잠을 못들었다. 아이에게 전쟁은 우리를 해할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이가 잠이 들때까지 잠시 곁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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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the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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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면서생(白面書生): 오직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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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유행한 유머중에 하나가 ‘연애를 글로 배웠습니다.’ ‘키스를 글로 배웠습니다.’이다. 나는 그러한 유머를 볼 때마다 배꼽을 붙잡고 웃는다. 내가 그 유머에 자지러지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새로운 경험에 항상 목말라 있었고, 그 갈증을 해결했던 방법은 주로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매료 시켰던 것은 주로 역사이야기, 세계 전래 동화, 각국의 신화, 성경이야기, 탐정소설, SF 소설 같은 것들이다. 딱히 분야가 정해져 있던 것 같지는 않고 잡식을 했는데 한가지 공통되는 점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기 있는 통속소설이라는 것은 인기가 있을 법한 소재와 인물을 사람들의 판타지와 적당히 버무려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 있는 소재만을 가져온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허접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소설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는데, 이때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 히어로물의 세계관이라고 하면 슈퍼맨/배트맨이 등장하여 초인적인 힘으로 세계를 구하지만 괴로워하거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세계관이라 하면 뉴욕에 사는 매력적인 직장여성들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우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은 소설속에만 존재하는 법칙 같은 것인데 우리가 대부분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안들거나 싫어지는 이유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불행하게 생을 마치는 식의 세계관이 탐탁치 않고, 어떤이는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다며 지루해 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세계관과 맞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세계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야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세상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영화와 소설 속의 세상을 실제와 혼동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소설과 다르다. 만약 뉴욕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이 섹스 앤 더 시티나 프렌즈가 그리는 뉴욕이 정말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이 살려고 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행동은 코메디의 소재로 적합하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무협소설이나 연애소설에 나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하고 연인에게 행동한다면 가장 빵점인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소설/공연예술에 목을 메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이야기라는 것이 별로 의미 없게 여겨지는 순간이 왔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얄팍하며, 어떤 이야기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어떤 소설은 그저그런 세계관을 독특한 문체만으로 잔뜩 치장했을 뿐이다. 너무 뻔하다. 내가 알고 느끼는 세계와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가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소설읽기를 멈추었다. 소설보다는 자기계발서를… 영화보다는 예능프로를… 즐겨보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저자가 다른 경우에도!) 그저 동어 반복일 경우가 많다.

이제 책하고 화해를 할까 싶다. 검증된 고전의 경우에는 조금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지혜 같은 것이 있다. 10대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는 그저 낚시꾼의 허무한 귀환 정도의 재미없는 글이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만나는 헤밍웨이는 자연의 위대함, 인간의 의지를 찬양하는 작가이다. 어린시절 톨스토이의 단편은 그저 재미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한번 종교/삶과 씨름을 해본 후에 만나는 톨스토이는 소박한 이야기에 닮긴 경건함이다.

여전히 사람과 관계 맺기에 미숙한 한 백면서생의 이야기였다.

그림 습작

올해 시작한 일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블로깅이고 하나는 그림 그리기이다.

그림은 가은이가 어렸을 때 놀아주면서 몇가지 그림을 끌적거려 본 것이 시작이었다. 크레용/볼펜으로 아이 그림 책에 있는 그림 몇개 따라 그렸을 뿐인데, 가은이가 몹시 좋아했다. 여기서 내 덕후 본능이 발동한 것 같다. 꽤 심혈을 그려 몇개를 그려보았다. 그리 나쁘지 않았나 보다. 울 마눌님이 보고서 미술 클래스를 등록할 것을 권했다. 그러게 말이다. 왜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그려거나 배워볼 생각을 못해봤을까?

처음에는 아크릴화를 그렸고, 그러다가 기초를 다지고 싶어서 드로잉 클래스를 수강 중이다. 글쓰기 못지 않게 재미있는 게 그림 그리기. 페이스북에는 친구공개로 포스팅을 해왔는데, 오늘 블로그에 몇개 정리해서 포스팅.

<드로잉 클래스 전에 수업 들었던 아크릴화>

직접 찍은 사진 중에서 직접 고르고 그려본건 이 그림이 처음이다. 풍경화/초상화도 몇개 시도해 봤는데, 풍경화/초상화는 인물화랑 필요한 기술이 조금씩 다르다. 나는 그리고 싶었던 것을 그린 첫번째 그림이라서 마음에 든다. 그림의 모델은 우리 딸. 가은이는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ㅎㅎ

캡처캡처

<처음 그린 연필 정물화>

캡처

 

First charcoal drawing. Charcoal is a somewhat messy medium but it was fun.

목탄화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익숙해지기 쉽지 않더라. 흑연연필화와 확실히 다른 느낌이 있다. 유리는 재미있게 그려볼만한 소재였다. 시간관계상 포도를 제대로 못그렸는데 아쉽지만 첫 목탄화 그려본 기념으로 포스팅.

캡처

Second charcoal drawing. Drew light, medium, and dark colored fruits on toned paper. Started to like charcoal drawing. Bell pepper was really fun to draw. It is somewhat glossy and has a variety of color to it.

두번째 목탄화. 목탄은 조금 익숙해지니 약간 거친듯 하면서 풍부한 명암이 매력적인 도구더라. 피망을 그리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세가지 과일의 질감을 다르게 표현 해보려 했고 몇가지 다른 시도들을 해보았다. 사진으로 찍고보니 목탄화의 깊이 있는 검은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

캡처캡처캡처

이번주 수업은 콘테이다. 매번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데, 새로운 재료를 접하는 것은 몹시 즐거운 경험이다. 그려보고 그럴 듯하면 또 포스팅을 해볼 생각….ㅎㅎ

 

글쓰기 중독

다운로드

인터넷에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 시리즈를 발견했다. (링크: 고종석 “글쓰기의 쾌감, 중독되면 끊을 수 없어”) 글쓰기 특강 연재의 대부분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듯.

특별히 공감한 두 부분

“달리는 사람에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찾아온다는 marathoner`s high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writer’s high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제법 마음에 드는 순간, 그 쾌감을 맛보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계속 쓰게 된다는 거였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고종석은 몇 가지 작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나는 글을 쓸 때 행갈이에 신경 쓰라는 말이었다. 의외로 많은 수강생들이 행갈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의 문단은 하나의 생각 덩어리이기 때문에 문단을 제대로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단을 잘 나눌 수 있다는 건 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글을 읽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고종석은 또 문단나누기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내가 처음 글쓰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연습했고 지금도 신경쓰는 부분은 문단 나누기와 한 문단에 한가지 생각만 담기이다. 아직도 그게 쉽게 되질 않는다. 공감가는 글을 만나고서 박수가 쳐졌다.

나는 글을 쓸 때 나쁜 습관이 많이 있다. ‘수동태의 문장을 즐겨 쓴다.’ ‘만연체의 문장을 쓴다.’ ‘쓸데없는 부사와 겹조사로 겉멋을 부린다.’ 등등… 내 사고 체계가 명료하지 못해서 머리속의 생각을 처음 글로 옮겨 놓으면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나의 글을 교정을 볼 때는 이런 부분에 몹시 주의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본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글맛이 있도록 글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 사람은 헤밍웨이이다. 그가 말한 글쓰기에 대한 언급도 여기 몇자 옮겨본다. 그러고보니 헤밍웨이와 고종석은 기자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구나.

“글을 쓰는 일은 잘해야 외로운 삶을 사는 겁니다. 작가를 위한 단체는 외로움을 덜어주지만 글이 좋아지는가 하는 점에는 회의가 듭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면 작가의 공적인 위상은 올라가지만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가 종종 있죠. (노벨상 수상소감 중에서)”
“내가 이룬 성공은 모두 내가 아는 것에 관한 글을 써서 이룬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심성이 많아질 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글, 그게 아니면 멋진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그다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네. 그녀가 읽거나 쓸 줄 아는지, 또는 생존인물인지 고인인지 상관하지 않고 말일세.”

요즈음의 나를 보면 글쓰기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제 조금 숨도 고르고 쉬어가며 글을 써야겠다. 내공이 부족한데다가 생업이 있는 사람인데 이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질듯…

조언자를 찾고있는 당신을 위하여

최근에 회사에서 좀 부담가는 일이 하나 생겼다. 우리회사의 텔레마케터들을 모아서 마케팅에 대한 강의를 하라고 하는 압력이다. 나름 이제 뻔뻔함이 생겨서 회의에서 문법틀려가면서 콩글리쉬로 이야기 하는데에는 별 스트레스가 없지만 미국 아줌마/아저씨들 모아놓고서 호흡이 긴 강의를 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크다. 결국 하게되지 않을까 싶지않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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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EB Research)

그분들 모아놓고 하려는 강의 자료중에 하나는 위의 내용이다.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인터넷 세상이 오면서 이제는 고객들에게도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디지털 이전 시대에는 고객들이 정보가 부족하여 영업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다면 요즈음은 대부분의 고객들이 이미 정보를 알고 있고 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기업에 문의를 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 보아도 확실히 그렇다. 어떤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기전에 제품에 대해 사전에 검색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먼저 찾아본다. 은행의 금융상품이나 컨설팅 서비스, 학원, 음식점, 여행지의 숙소를 선택할 때 우선시 하는 것은 주변사람의 추천이나 입소문이지만, 그다음 찾아보는 것은 인터넷이다. 직접 추천을 못받는 경우에도 디지털 세상에서는 정보가 부족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의사에게 상담을 받고 진료를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이전인 20세기에는 의사의 말이 곧 진리였다. 의학관련 정보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의사가 말해주는 처방을 단순히 따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건강 정보는 세상에 넘처난다. 우리는 의사를 만나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고 주위의 조언을 먼저 듣는다. 의사를 만나서 진료를 받은 후에 의사의 진단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진단과 처방을 내려주는 의사를 만날 때까지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 2nd opinion을 받는 것이 나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의사의 권위는 예전만 못하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없어져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조언에 목말라 하는 시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다만 조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듣고자 하는 내용이 바뀌었다. 20세기에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서 정보를 듣고자 했다. 요즈음의 우리들은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또는 판단을 전문가가 인정해 주는가?’ 하는 것을 듣고자 한다. 세상에 넘처나는 정보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사람들은 더욱더 불안해졌으며 누군가가 나서서 나의 판단에 확신을 줄 것을 갈구하고 있다.

우리세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키워드는 ‘공감’이다. 어느새인가 인터넷 공간에서 권위있는 기성 언론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져가고 있다. 요즈음의 사람들은 주변의 누군가가 올려놓은 공감 베스트 글에 마음을 연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좋아요’를 많이 받은 인기글을 쓰는 사람들은 요즘 세상의 celebrity이다. 웹툰계에서는 일상의 작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생활툰’이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가 즐겨보는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공감을 자아내는 소재를 다룬 코너들이 대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입장이 되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떤 분야에서도 어느정도 잘하는 사람이 된적은 있으나 일인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세를 따르기 보다는 내가 그냥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어리고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누군가의 조언에 목말라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조언자를 구했던 방법이나 원칙에 대해서는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나와 유사한 고민을 해봤던 사람을 찾는다. 이때 주의할 점은 너무 오래전에 그 고민을 해보았던 사람은 안된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뒤라면 그 사람은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을 하고 문제를 바라보게 되어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까? 우리가 경제적인 문제를 은퇴한 어르신에게 묻는다면 그분은 노후보장과 은퇴준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가능성이 크다. 고등학생이 학창시절에 대해 어른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이야기는 역시나 대학입시나 성적이 중심이 될 것이다. 어른의 시각에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의 인정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은 지나가는 순간의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렇지만 정작 그 어른들은 직장에서의 상사의 인정에 목을 매어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사람의 입장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다. 인생에 있어 그러한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만난다면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입을 앞둔 학생들, 진로의 고민을 하는 20대에게 그러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몇년 앞의 조언자의 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둘째로는 ‘나이든 사람의 조언을 찾는다.’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숫자적인 나이보다는 진정으로 삶을 고민하고 치열하게 살아간 경험으로서의 나이이다. 이러한 조언을 듣는 데에는 어느정도의 훈련과 자신의 관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들의 조언은 대부분 나의 상황과 다른 맥락과 관점의 조언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 어른들의 말이나 금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가끔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나의 상황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문제를 단순하게 볼 때 해결책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세상 돌아가는게 어쩔 때는 너무 복잡하게 보이지만, 때로 단순한 삶의 지혜나 원칙이라는 것은 여전히 먹힌다. 그 지혜라는 것은 어떤 복잡다단한 이론이나 체계적인 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은 투박한 모습인 경우도 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네 잔소리 일 수도 있다.

그 지혜라는 대상이 굳이 사람일 필요는 없다. 어쩔 때는 고전이 답일 수도 있다. 가끔 오래된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책을 들추다가 고민에 대한 해답, 또는 지혜라고 불리우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대부분의 고전은 오랜 세월을 통해 여러사람들에게 검증된 책이고 우리의 현실의 문제에 직접적인 답을 해주지 않지만 중요한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내가 딸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것은 이러한 책을 통한 관계 맺음을 어려서부터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이다. (관련글: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은 단순한 고전을 넘어서는 책이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익함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에게 조언을 구한다.’ 이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과정을 거쳤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친 단계이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필요 이상 고민하게 되면 쓸데없는 고민이 되어 버린다. 삶의 불확실성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서 너무나도 우리를 옭아맨다. 본래 완벽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나의 느낌에 충실해야 할 때가 있다. 일단 던져보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수정을 한다던가 또는 완전히 접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는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판단의 잣대는 감정과 직관일 것이다. 결정의 순간에 있어서 내가 당시 하고 싶은 것을 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지나고 생각해봤을 때 후회가 남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선택해 왔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도 그렇다. 내 인생을 결정지었던 많은 결정들은 후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르고 했던 것이 대부분 이었다. 고2때 이과를 선택했던 것, 대학 때 화학공학이라는 전공을 선택했던 일, 현역으로 군대를 갔던일, 미국으로 온 일 등등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이었다. 당시 주위의 조언을 듣기는 했지만 나는 그 조언을 토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정도로 나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단지 ‘수학이 좀더 좋았다.’, ‘영어는 싫었다.’, ‘화학이 왠지 끌렸다.’, ‘현역으로 군대를 가면 세상 경험을 할 것 같다.’ 등등의 왠지 모르는 나의 감정과 직관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 왔다. 지금에 와서 돌아볼 때, 어떠한 결정은 인생길을 돌아오게 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어쨌건 나의 감정과 직관에 기반한 결정이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감정과 직관에 의한 결정은 두가지 측면이 있다. 일단 어떤 일이든지 자기가 좋아해서 하게된 일은 꾸준히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자의식이 있어서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 있어서는 일종의 책임감이 생기게 된다. 기본적으로 자질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질이 꾸준한 노력과 시간을 넘어서지 못한다. 또 직관이라는 것은 묘한 측면이 있다. 직관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의식 또는 이성의 영역 밖의 나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직관은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타고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오늘도 꽤 긴 글을 썼다. 처음에 자판을 잡고 글을 시작했을 때는 ‘공감’이라는 주제와 ‘조언자를 찾는 원칙’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고서 가볍게 시작했으나 쓰고 보니 어떤 팁이라기 보다는 나의 희망사항이나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만 그리다가 말은 모양새가 되었다. 최근 내가 이런 글을 올리는 걸 보니 확실히 요즈음의 나는 자의식 과잉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이글을 다시 보면 낯뜨거워 질 것이 분명하지만 일단 기록을 남기는 의미에서 포스팅을 한다.

페르시아의 유대인 말살 정책과 에스더

아이를 키우면서 그나마 잘한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매일 자기전에 성경을 읽어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내가 무척이나 자상한 아빠인 듯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매일 읽어주었던 것은 아니고 귀찮은 날은 모른척 건너뛰기도 자주했다. 또 우리 마나님의 잔소리에 못이겨서 억지로 읽어준 적도 많이 있었고, 지금은 성경책 읽어달라는 아이의 성화에 마지못해 읽어줄 때도 많다.

아이에게 성경원문을 그대로 읽어주는 것은 그 수준에서 맞지 않는 일이라 아직까지는 어린이 성경을 읽어주고 있다. 처음 시작은 아이가 만 3세 였던 2012년. 그때 읽어 주었던 책은 아가페에서 나온 ‘아장아장 성경’, 그리고 2013년 읽어 주었던 성경은 ‘두란노 어린이 그림 성경’. 2014년 지금은 ‘두란노 이야기 성경’을 읽어주고 있다.

매해 수준이 조금씩 높히고 있는데, 지금의 책은 만 5세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듯 하여 처음에는 조금 망설였다. 예를 들자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언급한다던지…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이야기를 묘사한다던지… 어린 딸에게 살인이라는 이야기를 묘사 해야하는 순간에는 혹시라도 이 아이가 ‘살인’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나 조마조마 하며 빨리 넘어가곤 했었다. 그런데 구약에는 생각보다 살인의 장면이 많이 나오더라. 어느 시점에서는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약속을 하는 이야기. 몇번을 다시 읽어달라고 한다. 그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서 my favorite이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아브라함이 별을 ‘하나, 두울, 세엣.’ 하고 세는 장면에서는 항상 웃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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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ictors – The Banquet of Esther and Ahasuerus

이번주에 아이에게 읽어주는 본문은 에스더 이야기이다. 혹시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 성경에 친숙하지 않은 분을 위하여 내용을 짧게 설명하면 이렇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페르시아의 장관이었던 하만은 유대인을 증오하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계략을 사용하여 아하수에로 왕이 모든 유대인을 말살시키라는 칙령을 내리도록 한다. 유대인이었던 왕비 에스더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왕의 민족말살 명령을 거두게 하고, 하만 장관은 실각을 하게 된다.

성경의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줄 때마다 무척 조심스럽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구약의 경우에는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이라는 온전한 인격체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자칫 잘못 읽혔다가는 공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만의 하나님으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나 성경 원문 그대로가 아닌 짧게 축약된 이야기의 경우는 편집자의 시각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성경의 사건중에 몇가지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의 이야기가 그렇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살던 모든 민족을 말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토착민을 몰아내고 인종청소를 하라는 이야기인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는 비윤리적인 일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부분에 학자들의 의견은 몇가지로 나뉘는데, 나는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이었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고대인에게 있어서 전쟁에서의 압승은 말살이라는 표현으로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죄악이 넘쳐흐르는 가나안 민족에 대한 징벌의 개념으로 나온 결론이 진멸(殄滅)이다.

형이상학에 깊이가 일천하며 신학/윤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문제를 더 깊이 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수준의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는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는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력에서 시작되었다는 정도이다. 성경 속의 가치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석하고 시대적 맥락을 무시할 때 이러한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에스더 이야기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말살을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때 유대민족은 다른 민족을 말살할 수 있는 입장보다는 몰살을 당할 위기에 처한 적이 더욱 많았었다. 에스더 이야기가 기록되었던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을 재건하던 때이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에스더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위로의 메세지이다.

이번주에 에스더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하나 알게 된것은 이제 아이에게 ‘권선징악’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몇달 전에 창세기와 사무엘서를 읽어줄 때만 해도 누군가가 죽거나 위험에 처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던 아이였다.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에게 확인하는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아빠, 하만은 나쁜 사람이야? 아하수에로 왕은?” 지금은 누가 선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인지부터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위험에 처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괜찮아 하나님이 다 지켜 주실 건데 뭘… 나중에 나쁜 사람들은 다 벌받지?” 이렇게 물어본다. 아이가 어디서 권선징악의 개념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성경책을 읽어가며 자연스럽게 형성이 된 것일까? 아니면 요새 즐겨보는 ‘번개맨’이라는 만화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일까?

고작 만 5세 딸아이 성경책 읽어주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다. ㅎㅎ 아마도 아빠로서 어린시절에 읽어주는 책이 이 아이에게 어떤 가치를 심어줄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지금은 5살 수준에서 권선징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정도로 만족한다. 사실은 만족하는 게 아니라 대견스럽다. 아이이지 않은가? 세상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나이가 먹고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러한 시각에서 발전이 없다면 그 또한 문제이겠지만, 권선징악은 윤리의 뼈대를 세워주는 훌륭한 기본틀 정도는 된다.

오늘은 자식을 키우면서 생각하게 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보았다. 별거아닌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신학/윤리/역사 같은 복잡한 주제를 건드리는 것을 보니까 병인 듯 하다. 딱딱하고 재미 없는 이야기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지금 가자에서 죽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평화가 임하기를 바란다.

무한경쟁의 삶은 우리를 어떻게 불행하게 만들었을까?

최근 한국에 계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무한경쟁의 삶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는 각박해지고 이제 부모님 세대에 있었던 고속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내가 먹여살리는 가족이라도 숨쉬고 살게 하려면 나라도 경쟁에서 조금 높은 고지를 점해야만 한다. 젊은 세대들은 권위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지만 너무나도 견고한 세상의 게임의 룰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젊은 세대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미국 또는 미국식에 대한 반발은 아마도 여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경쟁은 아름다운 것이고 건강한 경쟁이 세상을 발전하게 하는 동력이라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 사소한 것도 불만이 있다면 넘어가지 않는 그들이지만 경쟁에서 졌다면 깨끗이 승복한다. 당일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 받는다면 군소리 없이 바로 짐을 싸는 사람들이다. 직속상사가 자기보다 스무살 정도 아래의 핏덩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다면 불만없이 따라주고 깍듯이 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무한 경쟁 논리의 본산인 미국 사람들은 모두 불행하고 만족하지 못하며 살것 같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한국사람들이 더욱 만족하지 못하며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있다.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다양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성공이라는 것을 정해진 잣대에 맞추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분화하고 서열화한다. 최근에 뉴스 중에 ‘감히 네가 연세대 동문이라고?” 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연세대 안에서도 입시 출신 별(정시합격, 수시합격, 장수생, 농어촌 전형 등등…)로 골품제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러한 세태가 어디 연세대 학생들의 문제이겠는가? 기사화 되지 않았을 뿐이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나라 국민들이라면 어디를 가서도 이러한 식의 시선과 판단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가장 중첩되어 있고 치열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대학입시이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한국대학서열구조

미국이 이상적이고 이러한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이다. 미국 또한 명문대가 존재하고 암묵적인 서열이 있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스탠포드 등등 같은 부동의 명문대가 있고 아이비리그 학교가 있고 주립대가 있으며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다. 그리고 명문대를 나오는 것이 사회적인 성공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정도로 세세하게 학교간 등급을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학교 마다 잘하는 분야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해서 어느 학교가 좋은가 하는 논쟁은 거의 무의미하다. 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서 좋은 학교 또는 직장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있다. 오히려 미국 사람들은 인간승리 드라마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식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교육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은 교육 현장에서 드러나는 문제가 단순히 교육 시스템이나 교육관계자들의 자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나의 세대나 우리 부모의 세대와는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며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볼때 학교는 졸업장을 주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다. 시험대비 만을 위한 지식이라면 또는 스펙을 쌓기 위한 교육이라면 학교 말고도 사교육 시장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는데 졸업장을 위해서 수업을 참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억압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준다면 또는 다른 대안이 있다면 억압 만을 가져다 주는 학교에 누가 앉아 있겠는가?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요즈음의 아이들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다. 아직 사회에 발도 디뎌보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묻는다. 법을 지키고 착하게 살면 손해보는 게 아닌가?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직장을 얻고 성공하는게 맞는가? 그들은 이미 연예 뉴스에서 병역기피를 매일 보고 있고, 쪽집게 과외로 지름길을 따라 가는 삶의 요령을 배우고 있다. 우리 세대처럼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순진한 아이들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실은 그 깊이가 일천하다는 것이다. 내가 삶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웠던 순간은 경제적인 불확실성이 있지만 끝까지 버텨봤던 순간, 그리고 내가 가진 열악한 조건과 현실을 알게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그때 였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많은 것을 알지만 얇게 알기 때문에 오히려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서 세상의 부조리를 읊어댈 뿐이다. 이것이 아이들만의 또는 젊은 세대들만의 문제인가? 아이들이 이러한 질문을 했을때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 글을 주섬주섬 정리해보련다. 다시 다양성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은 정말 손을 꼽을 정도로 적다. 어느 한가지 방법이 맞고 다른 방식은 틀리다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권위주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경쟁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내가 세계를 보는 관점은 경쟁과 개개인의 욕망이 세상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기심과 경쟁심리가 때로는 지저분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방향을 볼 때 건전한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은 인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다만 그경쟁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쟁이라면 모든 이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반대해야할 미국식(?)은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극단적으로 만약 우리의 인생을 수능을 보듯이 점수화 시키고 등수화 시켜버린다면 우리 모두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대다수는 상위 10%에 들어가지 못해 불행할 것이며, 상위 10%에 들어가는 사람은 1%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행할 것다. 상위 1%에 들어가는 사람은 상위 1% 밖으로 밀려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모두가 지는 게임이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1등을 할 수 있다. 또 어떤 순간에서 1등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살면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1등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고3때 수능을 보고 모든 것을 점수화했던 그 순간처럼 삶의 모든 가치들을 그렇게 획일화하고 단순화 시켜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한국사람들은 왜 외국에서 서로 피할까?

미국 몇년 살면서 외국에 체류하는 한국 사람에 대한 특이한 점 하나를 알게 된게 있다. 한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많은 곳을 일부러 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도 한국 사람만큼 정이 넘치고 끈끈한 사람들이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인사 나누고 고향이나 학교 등등의 호구조사를 하고서 공통분모를 찾는다. 하나라도 유사점이 있으면 바로 형/아우를 규정하고서 절친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다니는 건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는 그런게 이상하게만 여겨졌는데, 조금 지내다보니 나도 어떨때는 한국사람들하고 만나는게 불편할 때가 있다. 금새 친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너무 엮이게 되는게 부담스러운 거다. 사람사이의 관계가 좋게 되기만 한다면야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난다는 것 만큼 좋은 일이 없겠지만, 꼭 모든 사람이 나와 맞을 수는 없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특히나 이민사회는 그다지 넓지 않기 때문에 한번 알게 된 사람은 계속 얼굴을 마주치며 살아야한다.

한국인의 다른 특징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존댓말의 문화이다. 존댓말에 관련한 내 생각은 이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 (미국사람들에게 나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존댓말이다. 존댓말을 사용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손위/손아래를 따지게 되고 손위사람에게는 존중을 손아래사람에게는 복종을 요구한다. 나는 한국의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화가 존댓말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험과 연륜이 있는 사람에게 존경과 존중을 표시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단순히 숫자적으로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사람이 옳다거나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매우 복잡한 관계 속에 얽혀서 살고 있다. 우리는 나이, 학번, 입사동기, 사돈, 선배, 후배 이 모든게 얽혀서 서열을 정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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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임수정의 ‘내아내의 모든것’을 재미있게 본적이 있다. 거기서 임수정은 눈치안보고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지만 밉상은 아닌 캐릭터로 나온다. 그중에서 인상깊었던 한 장면이 남편이 다니는 회사의 와이프들끼리의 모임 장면이다. 이러한 모임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거기서 와이프들끼리의 관계는 남편의 직급으로 규정된다. 한 아주머니가 임수정에게 말을 한다. “와이프가, 눈치가 아주 많이 없네!” 이때 임수정은 그 사모님들에게 말을 한다. “눈치를 안 보고 살아서 그래요. 예의만 지키면 눈치는 안봐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영화의 큰 맥락과 관련이 없는 장면이었지만 내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다.

미국와서 한국 아이들과 미국아이들의 차이점을 하나 발견한게 있다. 한국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누가 형이고 언니인지 먼저 따진다. 그런데 아이들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한가지가 있다. 미국은 학기가 가을에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 9월이나 10월 생들이 학교를 빨리 간다. 거기서 바로 복잡한 호칭 문제가 발생한다. 나이가 같은데 학교를 먼저 갔기 때문에 형이라 해야 할지 언니라 해야할지 애매해 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빠른 xx년생이랑 비슷한 상황이다. 이게 미국아이들에게는 별로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그 아이들은 학년이 높다고 해서 존댓말을 쓰는 것도 아니고 호칭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학교를 먼저 갔을 뿐이다.

미국 아이들도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보통 리더십이 더 있기는 하다.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논 이야기를 들어봐도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놀이를 주도할 때가 많다. 선생님/학생 역할 놀이를 할때 생일이 빠른 아이들이 선생님 역할을 맡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또래에 비해 성숙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리더십이지 존댓말이나 호칭으로 인위적으로 생기는 리더십은 아니다.

한국인은 나이를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몇살에는 취직을 해야하고, 몇살에는 결혼을 해야하며 아이를 나아야하고 등등 모든것이 나이에 맞춰져서 되어질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문화라는 것은 각자 모두 이유가 있고 옳고 그르다기 보다는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러한 부분은 정말 아쉽다.

huffingtonpost korea에 올라온 코스타리카 관련 글들을 보고서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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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huffingtonpost korea에 올라온 코스타리카 관련 두개의 아티클을 보고서 든 생각을 올려본다. 본문의 내용과 상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하다.

‘8강 돌풍’ 코스타리카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과연 코스타리카는 지상천국일까?

남미출신 친구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곳은 만성적인 인플레가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곳에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불가능하다. 잠깐 지상낙원으로 소개되었던 코스타리카도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듯.

남미 쪽 물가상승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인지라 그동네 화폐들은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고 봐야할 듯 하다. 예전에 mba 회계 case 수업때 남미 회사의 case를 다뤘는데, 상당히 건실한 기업이었는데도, 자국 화폐가치의 신뢰성 하락으로 복잡한 회계적인 이슈들이 있었다. 기업 회계 담담자 입장에서 골치 아픈 건 물론이고, 이정도 되면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거의 불가능 하다고 봐야한다.

우리나라도 70-80년대 고속성장의 부작용을 많이 겪은 나라이고, 이젠 나름 정부에서는 물가 통제(?)의 노하우도 많다.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정부에서 몇몇 기업의 총수들을 소환해서 압력을 넣는 방법인데, 이게 무식해 보이지만 아직 우리나라 정도의 규모 경제에서는 먹힌다. 그리고 실제 이런 방법을 우리나라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가 가끔 행복지수가 높다고 예시로 드는 부탄 같은 나라는 세계 경제의 지형도에서 섬같이 고립된 나라이니 우리가 지향점으로 삼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세계 경제는 어찌보면 미국화(?) 또는 신자유주의화(?)라는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견고한 모습의 유럽의 경제도 예전보다는 많이 미국처럼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개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한가지 생각나는 예는 휴가의 천국으로 불리는 프랑스 같은 나라. 이 나라는 한달씩 휴가를 가는 걸로 유명한 나라인데, 이런 럭셔리도 이제는 점점 옛날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고 들었다. 무한 경쟁의 삶으로 모두를 몰아가는 미국식 경제 모델은 전세계 모든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보적이고, 깨어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미국식 경제 모델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데, 나의 솔직한 느낌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대안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전세계적인 흐름을 거부하고 우리식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나아가는게 방법일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이미 우리나라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너무나도 높다.

우리나라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깜짝 놀랄 만큼 높다. 학교에서 거시경제 수업들을 때 한 나라를 선택해서 미국의 GDP와 비교하는 조별 과제가 있었다. 조원중에 한국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나… ㅠㅠ) 내가 총대를 매고서 우리나라 GDP와 미국의 GDP를 비교하는 작업을 해봤는데, 오히려 미국같은 나라는 내수의 비중(특히 서비스업)이 엄청나다. (그렇다고 논문이나 연구수준의 심도 깊은 리서치는 아니었다. 그냥 수업 중에 하나 과제였을 뿐….ㅎㅎ)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 정도 경제규모가 되는 나라는 세계 경제와 동떨어져서도 사는게 가능하다.

내가 자본주의의 본산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경영을 공부해서 그런지 다른 대안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진보적인 학자들이나 참신한 의견들이 많고, 그런 목소리들이 색다른 시각을 던저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역시나 아직 그런 목소리들이 주류라고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내가 워낙 형이하학적인 인간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기존의 경제체제나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은 너무나 견고해보이고, 진보적인 목소리는 아직도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Thomas Piketti on the history of money

“The average income of the parents of Harvard students is equivalent to the top 2% of the US income distribution.” Watch what Thomas Piketti says.

한국에도 최근 불고 있는 피케티 열풍의 주인공인 피케티 교수의 동영상

부와 교육의 상관관계는 논란이 되는 큰 주제인데, 최소한 영어 교육에 한해서는 잘사는 집이 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교육이 20년동안 걸어온 방향은 영어 강화 수학/과학 약화가 하나인데, 그렇다면 수학교육 강화가 모든 문제의 답일까? ㅎㅎ 문득 들은 뻘 생각.